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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걸음으로 서있는 병원에 이렇게 했다. 관계?는녹나무 고목이 제주에서 자생하는 모습. 한반도식물다양성연구소 제공


캄포 도마를 선물로 받았다. 석 달간 목공 수업을 들으며 정성껏 만들었다 한다. 향기가 나니 주방에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해줄 거라고 지인은 도마를 자식 대하듯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캄포는 녹나무다. 정확하게는 녹나무에서 얻는 정유 물질인 장뇌(樟腦)를 말하는데, 그게 고유명사처럼 널리 쓰이다보니 아예 녹나무 자체를 캄포라고 부른다. 내게 도마를 만들어준 이의 말처럼 녹나무는 목재의 향이 무척 좋다. 편백이나 측백에 발효된 찻잎이 더해진 향 같달까. 낯설지만 당기는, 적당히 무게감 있는 우아한 향이다.
호랑이 연고도 녹나무로 만든다
저소득대출녹나무 체내의 화합물이 방향(芳香), 그러니까 꽃다운 향기를 발산한다. 장뇌와 리날로올을 중심으로 사프롤, 시네올 등이 후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항균 작용까지 하는 것이다. 그 특유의 향은 나무를 자르지 않아도 잎과 가지 구분 없이 몸 전체에서 발산된다. 그래서 녹나무의 에센스는 향수와 비누와 살충제 따위를 만들 때 쓴다. 우리에게 익숙한 물파스 목돈굴리기 나 호랑이 연고의 원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제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대만, 인도, 베트남 등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난대, 아열대 지방이 녹나무의 원산지다. 그 일부 국가에서는 자연적으로 사는 녹나무 외에 추가로 사람이 심어 기르는 녹나무가 번성했는데 그 둘의 경계를 가늠하는 게 언젠가부터 어려워졌다고 한다. 장뇌를 얻을 목적에서 자 노던록 생지 밖에 심은 나무들이 야생에 너무 퍼졌기 때문이다. 원산지가 아닌 다른 국가에 건너가서도 녹나무는 번성했다. 1822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한 녹나무는 금세 무성한 숲을 이뤘다고 한다. 녹나무의 장뇌 성분은 주변에 다른 식물이 못 살게 하는 특별한 전술을 펼친다. 이를 타감작용(他感作用)이라 한다. 한 개체가 자신의 휘발성 물질로 가까이에 있는 다른 식 기금운용본부 물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유칼립투스와 같은 토착종을 밀어내서 유칼립투스를 먹고 사는 코알라가 곤경을 겪을 수도 있다고 퀸즐랜드 전역과 뉴사우스웨일스 일부 지역에서는 녹나무를 유해 수종으로 낙인찍었다. 해로움이 있을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란 녹나무는 ‘청정 지역 호주 캄포’라는 광고성 문구와 함께 전세계 목재시장에서 비싼 울산 새마을금고 값에 거래된다.



‘캄포’로 널리 알려진 녹나무로 만든 도마. 캄포는 색과 결이 곱고 향이 좋은 목재다. 편백이나 측백에 발효된 찻잎이 더해진 향 같다. 항균 작용이 탁월해서 녹나무 목재는 벌레가 잘 생기지 않고 보존성이 높다. 위키미디어 제공


죽어서도 향긋하게 또 한 번 사는 나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는 목수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에서 아버지를 통해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집을 떠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한 번씩 그 집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깜짝 놀란다. 기둥과 대들보며 한옥의 자태가 어릴 적 내 기억 속 모습처럼, 아니 전보다 더 젊고 생기로워 보여서다. 나무는 나무로서 일생을 살고 나면 죽어서 목재로서 또 한 번 생을 산단다. 대목수 할아버지가 나무를 매만지며 아버지에게 자주 했다는 그 말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할아버지도 녹나무를 접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말썽일 정도로 많이 사는 녹나무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만 아주 드물게 살기 때문이다. 귀한 만큼 녹나무 목재는 과거에 왕실의 가장 필요한 곳이나 신성한 곳으로 먼저 보내졌을 것이다. 왕실 무덤의 목관을 만들 때, 사찰에서 불상이나 목어를 만들 때, 거북선과 같이 역사적 사명을 지닌 배를 만들 때 녹나무 목재를 썼다. 방향과 항균 능력이 탁월해 벌레가 잘 생기지 않아 보존성이 높고 목재의 색과 결이 곱다고 하는 그 녹나무. 지금은 그 목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캄포’로 널리 알려진 녹나무 목재. 캄포는 색과 결이 곱고 향이 좋은 목재다. 편백이나 측백에 발효된 찻잎이 더해진 향 같다. 항균 작용이 탁월해서 녹나무 목재는 벌레가 잘 생기지 않고 보존성이 높다. 위키미디어 제공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제주도의 나무로 지정한 것이 녹나무다. 녹나무를 찾아 떠나는 나만의 제주 여행지가 있다. 공항에 내려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 제주 시내 한가운데 있는 삼성혈(三姓穴) 사적지다. 탐라국 시조에 대한 제의가 이뤄지는 장소로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곳. 원형의 돌담을 쌓고 둘러 혈제(穴祭)를 지내도록 성역화한 건 일찍이 1526년의 일이라 한다.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 있을 법한 녹나무 고목 여러 그루가 삼성혈 사적지에서 우람하게 자라고 있다. 콩짜개덩굴이나 일엽초와 같은 양치식물이 녹나무에 뒤엉켜 산다.
서귀포 ‘면형의 집’에는 녹나무 고목이 사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면형의 집은 에밀 타케 신부가 1902년 세운 홍로성당이 있던 곳으로 제주도 가톨릭의 초창기 역사와 관련이 있다. 타케 신부는 1898년 스물다섯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한국에서만 사셨다. 당시 참 힘들던 한국을 도우려 식물을 채집해서 유럽에 보내는 방식으로 선교자금을 모았다. 1952년 선종할 때까지 식물분류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타케 신부다. 면형의 집 녹나무가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지금의 고목이 된 건, 그 수도원 정원이 여러 초목으로 그토록 아름다워진 건 아마도 타케 신부의 살뜰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면형과 피정이라는 단어가 녹나무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면형(麵形)은 성경에 나오는 밀떡이 성체로 바뀐 후에도 그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겉모양을 이르는 말.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일 테다. 피정(避靜)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일을 뜻하는 가톨릭 용어다. 녹나무 앞에 서면 신령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 커다란 녹음 아래서는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서 가만히 쉬거나 기도하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녹나무가 그런 나무다.



제주 서귀포시 도순리 녹나무 자생지. 196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울창한 숲이다. 허태임 제공


녹나무 보고플 땐 제주나 부산으로
삼성혈과 면형의 집에 사람의 관리를 받는 녹나무가 있다면, 서귀포 도순리에는 야생의 녹나무 자생지 군락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 60년이 넘은 숲이다. 강정교를 중심으로 강정동과 도순동 일대 개천가의 급경사면에서 녹나무는 숲을 이룬다. 숲에는 천연기념물 원앙도 산다. 녹나무 숲은 냇가와 들판의 경계 역할을 한다. 그 경계 너머 북쪽으로 한라산이, 남쪽으로 서귀포 앞바다가 펼쳐진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녹나무 숲 주변의 문화재 보호구역 일부를 해제하고 어느 정도의 녹나무를 벌채할 것이라고 들었다. 강정교 재가설을 위해서라던가. 안타깝다.
부산에 가면 벌채 직전에 살아남은 녹나무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부산시민공원의 남문 입구를 지키는 녹나무다. 원래 시청 옆 사설 재활용센터 마당에서 살던 나무인데 도시계획으로 청사가 헐리게 되면서 잘릴 예정이었으나 극적으로 구조돼 2019년 여름부터 시민공원에서 살게 됐다. 그런데 부산은 녹나무가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 누군가가 어느 시기에 옮겨 심은 나무가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심은 녹나무가 남부지방에 드물게 있기는 하다. 그중 한 곳이 순천공업고등학교다. 1910년 양묘장 자리였다가 1946년 순천사범학교를 거쳐 지금의 학교 자리에 녹나무 거목 12그루가 줄지어 있다. 양묘장 시절의 묘목이 지금의 거목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부산에서 녹나무를 지킨 사례와 비슷한 일은 더 일찍 일본에서도 있었다. 오사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네야가와시의 가야시마역(萱島駅)에서 1972년의 일이다. 동네 사람들이 정령으로 여긴 가야시마 신사의 신목(神木) 녹나무는 철도 복선화 공사 때 댕강 잘릴 예정이었다. 역사 확장 공사는 주민들의 요구대로 녹나무를 그대로 남겨두고 진행됐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녹나무가 플랫폼 위로 넓게 펼쳐져서 마치 브로콜리 같기도 하다. “삭막한 느낌의 플랫폼에 초록을 더해 행복감을 준다”며 역은 1983년 오사카 도시 경관 건축상을 받았다.
오래 산 고목을 신성시하는 건 국경 없는 문화 같기도 하다. 1988년 일본에서 제작된 만화 영화 ‘이웃집 토토로’가 여러 나라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인기를 얻은 걸 보면. 한국에서는 2001년 개봉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영화를 보고 느꼈던 짙은 감동과 행복한 감정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고 너무 거대해서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숲의 요정 토토로가 사는 집이 바로 커다란 녹나무다. 주인공의 동생 메이가 폴짝폴짝 뛰면서 “녹나무, 녹나무!”라고 말한다. 영화 속 배경은 1950년대 도쿄 인근 시골 마을이다. 녹나무가 사는 마을로 이사한 자매와 토토로의 이야기는 사십 대가 코앞인 내게 여전한 명작이다. 이 영화는 어릴 적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앞으로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미래 같은 것.



녹나무 잎. 표면에 왁스층이 발달해서 반질댄다. 잎을 비비면 한약재가 섞인 듯한 특유의 박하 향이 난다. 허태임 제공


입춘에 태우면 나쁜 신 도망간다 믿어
입춘에 선조들은 녹나무를 태워 그 연기를 집집마다 풍겼다고 들었다. 그 냄새를 맡고 나쁜 신은 도망가고 좋은 신들이 찾아온다는 속설도 있었다 한다. 녹나무의 살균 효과가 악귀와 병마를 쫓는 풍습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이른 봄에 나오는 녹나무의 새순을 나는 더없이 좋아한다. 그 색감을 동경한다. 녹나무 새잎은 엷은 분홍색과 더 엷은 연두색 물감을 물에 푼 색으로 입춘이 지나면 입술을 내민다. 그러면 가지에 먼저 붙어 있던 묵은잎이 떨어진다. 새로 돋아난 잎은 점차 초록색이 된다. 표면 왁스층이 도톰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잎은 반질댄다. 녹나무가 상록수인 건 연중 같은 녹색의 잎을 달고 있어서가 아니라 묵은잎을 떨구는 동시에 새잎을 키우며 상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잎사귀를 반짝거리며 몇백 년을 누구보다 크게 산다. 죽어서도 변함없이 향긋하게 산다. 녹나무는 그렇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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