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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의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 걸어 다녀야 한다.’
존속 살해 혐의로 25년째 복역 중이던 무기수 김신혜에게 무죄가 선고된 지난 6일, 변호사 박준영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글귀를 떠올렸다. 무죄를 확신하기엔 워낙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고, 의뢰인 김신혜로부터 열한 번 해임을 당하면서 그의 결백을 의심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수원 10대 소녀 상 뮤지컬할인이벤트 해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낙동강변 살인 사건,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등 억울한 사법 피해자를 구제해온 그가 집념으로 일군 또 하나의 장거(壯擧). 박준영은 “24년 10개월 동안 결백을 외치며 독방에서 사투를 벌여온 한 여인의 존엄에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 22살 무기수를 처음 만난 미국저금리
-사건 발생 25년, 재심 청구 10년 만이다.
“2014년 여름,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처음 김신혜씨를 만났다. 흑인 인권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을 다룬 영화 ‘저스트 머시’를 보면 그가 또래의 20대 사형수를 만나 충격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도 그와 비슷한 충격을 느꼈다.”
-김신혜씨와 나이가 인천개인회생 비슷한가?
“둘 다 70년대생이고 둘 다 완도가 고향이다. 나처럼 그녀 역시 새어머니 밑에서 동생들과 자랐다. 그런데 한 사람은 무기수, 한 사람은 변호사로 마주 앉아 있다는 게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변호를 맡나?
“내 아버지는 2001년 굴삭기에 치여 돌아가셨다. 영안실이 완도 대성병원이 우리카드 하이패스 었는데, 1년 전 똑같은 장소에 김신혜씨 아버지가 시신으로 누워 있었다. 업무상 과실치사 사건이라 경찰이 아버지 시신을 모포 위에 눕혀 놓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검시했는데, 김씨 역시 검시 장면을 떠올리며 괴로워할 때 그 고통이 나와 무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김중식의 시(詩) ‘식당에 딸린 방 한칸’에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미즈사랑 모델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는 시구가 있다. 그와 내가 닮아 있다는 생각에 더 각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무죄가 나왔지만,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다.
“판결문에 나와 있듯이, 딸인 김신혜가 새벽 1시경 술에 수면제 30알 분량을 타서 아버지에게 먹였다는 공소 사실과 달리, 피해자 위장에서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김씨가 새벽 1시경 완도로 들어오는 길목 검문소에서 차량 번호가 찍혔는데, 거기서부터 아버지 집까지 가려면 30분이 더 걸린다. 아무리 빨리 도착해도 1시 30분이 된다는 뜻이어서 이 또한 공소사실과 다르다. 친구들을 불러내 놀려고 했던 정황도 확인됐다. 재판부는 존속 살해를 저지르려는 이의 행동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다고 봤다.”
-검사는 보험금을 노린 범행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 보험이 8개라 그런 의심을 받지만, 그해 3월 말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던 김씨는 소아마비 장애가 있던 아버지의 치료비와 입원비를 걱정하며 보험에 가입했다. 한때 보험설계사 일을 했던 김씨는 아버지의 장애 사실을 알리지 않고 보험에 가입했는데, 고지 의무를 위반한 경우 계약 2년 내 보험금을 탈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보험금을 수령한다 해도 당시 미성년자였던 동생들은 새어머니가 대리 청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오래전 집을 나가 어디 사는지도 몰랐다. 당시 수사기관과 법원은 보험의 개수만 파고들었지 김씨가 한때 보험설계사였다는 사실, 보험 가입 경위, 보험금 수익자가 김씨를 포함한 상속인 전부라는 사실 등은 따지지 않았다.”



지난 6일 전남 장흥군 용산면 장흥교도소 앞에서 존속살해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김신혜가 24년 만에 재심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사법피해자 윤성여씨(왼쪽)와 낙동강변 살인사건 사법피해자 장동익씨(오른쪽)가 함께 환영하고 있다. /뉴시스


◇ 허위 자백은 어떻게 가능한가?
-‘남동생을 위해 허위 자백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나.
“재판부는 김신혜씨가 동생들과 우애가 좋았고, 부모처럼 동생들을 돌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이 자정 넘어 동생들이 사는 할머니 집에 가서 소란을 피운 것이다. 그로 인해 10대인 남동생이 범인으로 지목됐다는 고모부의 말에 김씨가 흔들렸다. 여자라서 아버지의 성추행을 범행 동기로 주장하면 선처받을 수 있다는 어른들의 잘못된 개입이 22살 여성을 수렁에 빠뜨린 것이다. 재심 법원은 성추행 또한 조작됐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김씨도, 남동생도 아닌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경찰은 친척들 진술에만 의지해 처음부터 김씨를 염두에 둔 수사로 몰아갔다. 김씨를 향하는 증거만 수집되고, 모순·의심되는 증거는 철저히 배제됐다. 전화 통화 내역 등 김씨가 진범이 아닐 수 있다는 객관적 증거가 있는데도 편철하지 않았다.”
-김신혜씨로부터는 왜 11번이나 해임당했나?
“10년 전 법원에 제출한 재심 청구서를 보면 내가 많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준비와 능력이 부족한 변호인을 상대로 갇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저항 방식은 해임이었다.”
-검찰은 항소했다.
“불법 감금, 영장 없는 압수수색, 폭행 등 가혹 행위를 통한 강요된 진술, 자발적이지 않은 현장검증 등 수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위법이었다. 2심에서 무죄를 뒤엎을 증거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낙동강변 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21년간 옥살이를 한 장동익씨와 최인철씨가 2021년 12월 4일 부산 연제구 부산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 공판을 앞두고 박준영 변호사(가운데)와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뉴스1


◇ 터널에 갇힌 사람들
-돈 안 되는 재심 변호를 왜 고집하나?
“처음엔 유명해지고 싶어 맡았는데, 운명이 됐다(웃음). 섬 출신으로 고졸 학력에 사법시험도 1점 차 턱걸이로 합격한 나는 특출난 사명감도, 정의감도 없는 변호사였다.”
-2007년 ‘수원 10대 소녀 상해치사 사건’을 맡으면서 약자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더라.
“범인으로 지목된 가출 청소년 5명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던 청소년상담센터 선생님들에게 감동받았다. 국선 사건만 대량으로 맡아 돈벌이에 여념이 없던 나를 정신 차리게 한 사건이다.”
-사법 피해자들은 대부분 미성년자이거나 장애인, 극빈층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 사법 피해자의 대부분은 못 배우고 가난해서 늘 차별 속에 있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분들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였다는 허위 자백을 할 수 있나?
“김상준 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오판의 요인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논문이 있다. 1995년부터 2012년까지 1심 유죄, 2심 무죄 판결이 난 강력범죄 사건 540건을 분석했더니 유무죄 판단의 차이를 초래한 원인 중 허위 자백이 차지한 비중이 20%를 넘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기댈 곳 없는 상황에서 일단 추궁에선 벗어나고 싶고, 수사관이 기망과 회유, 선처를 약속할 때 누구나 흔들릴 수 있다. 인간의 심리적 결함이 사법 절차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진범이 아닌 줄 알면서도 범인으로 몰아간다는 게 가능할까?
“터널에 갇히면 밖을 볼 수 없다. 실적과 특진에 대한 욕심도 진실을 왜곡한다. 모두의 잘못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존속살해 혐의로 24년 10개월을 복역한 무기수 김신혜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박준영 변호사는 "잘못에 침묵하지 않고 바로잡으려는 용기가 '지연된 정의'를 앞당긴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 사법 피해자들이 만든 ‘등대 장학회’ 제2의 노무현?
-수임료 없이 변호해 사실상 파산 상태를 선언한 적이 있다.
“탈북민 간첩 사건을 비롯해 김신혜, 삼례, 약촌 오거리 사건을 동시에 진행하던 2016년이었다. 재심 결과가 나오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실상 파산 선언을 한 뒤, 대중을 상대로 각 사건에 대한 ‘스토리 펀딩’을 했다. 5억원 넘는 후원금이 들어왔다. 공동체에 큰 빚을 졌다.”
-여론전이라며 비판하는 시선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형사 사건은 진범이 잡히지 않는 한 재심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경직된 재심 재판부에 억울한 사람들의 처지를 알리려면 여론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려에도 공감한다.”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나?
“1억짜리 마이너스 통장이 2개다. 한도가 거의 찰 무렵 재심에서 승소한 사법 피해자들이 사후 수임료 개념으로 얼마 주시면 다시 통장에 채워 넣는 식이다(웃음). 돈 벌어오라 소리 안 하는 아내에게 고마울 뿐이다.”
-2023년엔 ‘등대장학회’를 설립했더라.
“재심에서 승소한 분들이 배상금 중 일부를 공적 기금으로 적립한 돈이 1억 넘게 있었다. 거기다 낙동강변 살인 사건으로 21년 넘게 옥살이한 뒤 무죄를 선고 받은 장동익·최인철 선생이 4억원가량을 기부해주셔서 그걸 재원으로 설립하게 됐다.”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다던데.
“현재 위기 청소년들 30명에게 매달 장학금을 주고 있다. 담임 선생님, 교육복지사 등을 통해 신청을 받는데, 그 사연을 읽다 보면 마음이 정말 아프다. 한 명이라도 더 지켜주고 응원하고 싶은데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해서 여기저기 후원을 부탁드린다. 인터뷰에 응한 이유이기도 하다(웃음).”



용인의 ‘등대장학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준영 변호사는 혼자 장학회 일까지 하느라 분주했다. 그는 더 많은 아이를 가난과 차별에서 지켜내고 싶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 제2의 노무현?
-고졸 학력에 약자의 고통을 변호해 ‘제2의 노무현’으로 불렸다.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나는 공부도 얕고, 철학도 없다. 어릴 때 못된 짓도 많이 했다(웃음).”
-그간 맡은 사건들이 ‘재심’, ‘소년들’ 같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사건을 너무 단선적으로 묘사해 아쉬웠다. 약촌오거리 사건을 다룬 ‘재심’의 경우 황상만 형사님이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나만 부각돼 죄스러웠다.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도 곧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윤성여씨 무죄를 확신하고 내게 변호를 의뢰한 박종덕 교도관님을 주인공으로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삼례 사건 유족인 최성자씨가 진범을 용서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우리 사회에 사과, 반성, 용서의 가치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최성자 선생도 처음엔 망설이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막상 진범을 만나서는 ‘내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을 테니 당신도 속죄하며 열심히 살라’며 손을 잡아주시더라. 그것이 인간의 숭고함 아닌가?”
-정치권에서 러브콜도 받을 텐데.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더 잘하고 싶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잘난 사람들의 호령이 아니라 정직한 소시민들의 연대라고 했다.
“법과 제도로 정의를 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잘못을 바로잡을 용기, 타인에 대한 존엄과 관용의 힘이 나는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좀 더 품위 있어져야 한다.”
☞박준영
1974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목포대 전자공학과를 다니다 중퇴, 군 복무 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5년 만에 합격했다. 2007년 수원 10대 소녀 상해치사 사건 피의자 7명을 국선 변호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수원에 이어 익산 약촌 오거리 사건, 삼례 나라 슈퍼 강도 치사 사건, 낙동강변 2인조 살인 사건,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등의 재심을 맡아 무죄판결을 이끌었다. 2023년 등대장학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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