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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는 동아일보사 경영악화로 이어졌다. 경영위기에 직면한 경영진이 정권과 타협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 급여압류 최저생계비 았다. 1975년 2월 초순, 유신헌법 찬반투표가 통과되면 발행인 교체설과 함께 광고탄압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얘기가 퍼졌다. 일부 간부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기사를 못 쓰게 하거나 누그러뜨리려고 들었다. 이런 가운데 2월28일 동아일보사 정기 주주총회가 열렸다. 주주총회는 △일부 사원들의 거듭되는 사규 문란 행동을 주시하면서 모든 방법을 다하여 조속히 집값 하락 사내 질서와 기강을 확립할 것을 요망한다 △경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불요불급한 사업과 기구를 정비하고 기타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경영을 합리화할 것을 요망한다고 결의했다. 주총 결의는 사장으로 재선임된 김상만의 담화문에서 다시 나타난다. 김상만은 3월1일 담화문에서 “자기직분에 태만하거나 남의 직분을 침범하는 일은 무질서를 낳고 결국 자멸의 길로 대전 새마을금고 이끈다”고 밝혔다. 1971년 봄 회사를 떠났다가 3년여 만에 주필로 돌아온 이동욱도 취임사를 통해 사내 질서를 해치는 언사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입장을 밝혔다.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들은 매일 아침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 모여 침묵시위를 벌였다. 신용회복위원회 개인회생 /자유언론실천재단
이동욱은 한발 더 나아갔다. 3월4일 편집국 부장회의를 소집해 “광고탄압 이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과열되었다. 광고탄압이 일어난 12월25일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만의 담화문과 이동욱의 취임사를 통해 강조된 사내질서 문제는 3월5일 인사규정과 복무규정 개정으로 애엄마 시 명문화됐다. 동아일보는 ‘회사의 허가 없는 사내 집회나 무단유인물의 배포를 금지한다’ ‘기구를 축소, 폐지하거나 회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사원을 해임할 수 있다’ 등의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자유언론실천 운동을 펼치고 있는 기자들을 정리하겠다는 예고였다. 동아일보사 노동조합이 1989년에 펴낸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는 이동욱 취임 직후 사내 분위기를 한 기자의 발언을 통해 전하고 있다.
2월 초부터 ‘동아일보가 손들 시간이 다가온다’ ‘동아일보는 홍위병들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등 기분 나쁜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했다. 이동욱 주필이 복귀할 무렵 겉으로는 광고압력에 의해 동아일보가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예기치 않았던 백지광고, 격려광고와 성금 등으로 오히려 박정희 정권이 궁지에 놓인 시기였다. 박 정권의 반격이 예상되고 있었다. 회사 측이 집단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시작하면서 ‘당분간 조용히 있어야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게시판에 나붙은 18명 해임 공고 3월8일 오후 동아일보는 경비과 직원들을 증원, 외부인사의 회사 출입을 통제했다. 오후 3시 ‘경영난으로 인한 기구축소 조치로서 심의실과 편집국의 기획부와 과학부, 출판국 출판부를 없애고 소속 사원 18명을 전원 해임한다’는 공고문이 붙었다. 안종필은 2층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을 보고 얼어붙었다. 다른 기자들도 충격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격려 광고로 자유언론을 성원해준 국민에 대한 배신이었다. 해임된 기자들 가운데 자유언론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기획부 차장대우 안성열, 동아노조 지부장 조학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자유언론실천에 적극적인 기자들을 해고해 광고해약 사태를 해결하려는 정지작업이었다. 날벼락 같은 해고에 기자들 반발은 당연했다. 당초 분회장 선출을 위해 소집된 3월8일 기자총회 분위기는 침통하고 심각했다. 당장 제작을 거부하자는 강한 발언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회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집단해직 사태를 해결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경비절감이 이유라면 기자들 봉급을 깎아 함께 일할 테니 18명 전원 복직을 건의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2·28 주주총회에서 결의된 사안이라며 기자들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외려 해고의 칼춤을 멈추지 않았다. 3월10일 2명, 3월12일 17명을 해고하는 등 일주일 새 37명을 잘랐다. 그리고 마침내 3월17일 새벽, 괴한들을 동원해 편집국, 공무국, 방송국 등에서 농성하던 150여명을 강제로 쫓아냈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은 오전 10시 한국기자협회 사무실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안종필은 그날 밤늦게 귀가했다. 초췌했다. 편집국에서 농성 중일 때 옷가지들을 가지러 들렀던 낯빛이 아니었다. 이광자는 걱정이 들었지만,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 남편은 얘기했다. 자유언론을 위해 싸우는 후배들이 간곡하게 부탁해 기협 동아일보 분회장을 맡았다고…. 기협 동아일보 분회는 3월12일 밤 분회장 권영자, 부분회장 김명걸 등 17명이 해임되자 임시총회를 열어 안종필을 새 분회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제작거부 농성에 참여한 부차장급 기자는 여성동아 부장대우 권도홍을 비롯해 안종필, 권영자, 안성열, 고수균, 이인철, 배동순, 윤활식 등 18명이었다. 차장이나 부장 등 간부들은 대개 회사 편에 가깝기 마련이지만 안종필은 달랐다. 1973년 동아일보 연판장 사건 때, 1974년 동아노조 설립 때도 후배들 편에 섰다. 자유언론에 대한 소신이 있었겠지만 앞장서서 싸우는 후배들을 뒤에서라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분회장을 맡은 안종필은 제작거부 농성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처지였다. 안종필은 이광자가 걱정할까 봐 자세한 얘기는 않고 미안해했다. 이광자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피 끓는 젊은 기자도 아닌데 왜 앞장서냐고, 결혼해서 두 아이까지 있는 당신이 왜 앞으로 나서냐고, 제발 철 좀 들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런데 초췌한 표정의 안종필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안종필은 아이들 방문을 살짝 열어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다. 첫째 민영이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 예림이는 유치원생이었다. 안종필은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곧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1975년 3월 중순 안종필이 한국기자협회 회의실에서 김상만 사장 사죄와 부당인사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안종필은 3월18일 아침 동아일보로 출근했다. 정문 셔터는 내려져 있었고, 별관 후문에선 경비원들이 신분증을 일일이 조사해 들여보냈다. 20~30명의 사복경찰은 근처 동아일보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접근을 통제했다. 안종필과 동료들은 동아일보사 정문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1시간가량의 침묵시위를 마친 기자들은 2열 종대로 열을 지어 중부소방서를 지나 신문회관으로 향했다. 행렬의 선두에 안종필이 섰다. 신문회관 3층 복도는 앉거나 서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총회가 시작되자 규탄 발언이 이어졌다. 기독교회관에 있는 단식농성 기자들이 오후부터 단식을 풀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3월13일부터 2층 공무국에서 물과 소금만으로 버텨왔던 기자 23명은 3월17일 새벽 강제해산되면서 혜화동 로터리 우석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우석병원에서 긴급 치료를 받고 종로 5가 기독교회관으로 옮겨 단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총회 마지막에 안종필의 선창으로 모두가 구호를 외쳤다. “회사 측은 부당인사 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철회하라! 철회하라!” “이동욱 주필과 이동수 방송국장은 즉각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손을 치켜들고 구호 외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함성은 신문회관을 떠나가게 했다. 그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결성됐다. 위원장에는 문화부 차장 권영자가 추대됐다. 3월8일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으로 뽑힌 권영자는 제작거부를 결의한 3월12일 밤 해임됐었다. 안종필은 동아투위 중앙위원을 맡았다. 당시 가입 인원은 모두 147명이었다.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맞은편 신문로 세종여관에 임시사무실을 차렸다. 1년 전 부당해고로 갈 곳이 없던 동아노조 집행부가 사무실로 사용하던 여관방이었다.
◇동아투위 위원 줄줄이 연행, 구속 안종필은 1975년 3월27일 해임통보를 받았다. 3월17일 회사가 고용한 괴한들에 의해 쫓겨난 열흘 뒤 동아일보와 연이 끊긴 것이다. 1963년 부산일보 기자로 2년 남짓 근무하다가 조선일보를 거쳐 1966년 11월 경력으로 동아일보에 들어온 지 9년 만이었다. 만 서른여덟이었다. 안종필과 동료들이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1975년 3월 이후 시국은 암울했다. 박정희는 고려대생들이 유신반대 시위를 벌이자 4월8일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고 안암동 교정에 계엄군을 진입시켰다. 대법원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상고를 기각하자 18시간 만인 4월9일 사형을 집행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남베트남 패망 2주일 뒤 5월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동아투위 위원과 언론인에 대한 연행 조사와 구속도 잇따랐다. 4월24일 기자협회장 김병익을 비롯해 백기범, 홍사덕, 구월환, 정추회, 민병일, 안성암 등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기자협회가 국제신문인협회(IPI)에 발송한 언론 탄압에 관한 특별보고서와 IFJ(국제기자연맹)에 보낼 예정이던 연차보고서 때문이었다. 기자협회장 연행 사태는 1964년 한국기자협회 창립 이래 처음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김병익 등에게 “국가모독죄를 적용, 구속하겠다”고 협박하며 회장단 전원 사퇴를 종용했고, 회장단은 연행 나흘 만에 사퇴를 조건으로 풀려났고 4월29일 전원 사퇴했다. 5월12일 동아투위 서권석, 박종만, 김종철이 폭력 사범으로 구속되고 안성열, 김진홍, 김동현이 입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6월3일엔 고준환이 성북경찰서에 끌려가 사흘 동안 불교학생회 관련 조사를 받고 풀려났고, 6월11일 이부영은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에게 체포된 뒤 6월18일 긴급조치 9호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6월19일에는 권도홍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6월24일과 25일에는 이영록, 이태호가 유인물을 배포하고 대학생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연행돼 16일 동안 불법 구금됐다. 성유보는 6월25일 신문회관 앞에서 중앙정보부 요원 4~5명에게 납치당하듯 체포됐다. 이부영과 성유보는 이른바 ‘청우회’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해 긴급조치 9호와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 이부영은 징역 4년, 성유보는 징역 2년6개월을 받았다. 항소심에서 이부영은 2년6개월, 성유보는 1년 실형을 받았고 만기복역후 출소했다. 성유보는 2014년에 펴낸 회고록 ‘미완의 꿈’에서 ‘청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그 악명 높은 ‘남산 분실’이었다. 곧 40대 남자가 나타나 “이곳에는 이부영과 정정봉도 잡혀 와 있다. 당신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부영과 정정봉이 이미 모든 것을 다 불었으니, ‘청우회’에 대해 있는 대로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들은 구금 후 나흘째 되는 날 ‘청우회의 강령과 규약’이란 문건을 들고 와 “너희들, 이 나라에 모택동식 공산주의를 만들려고 청우회를 만든 것이지”라고 다그쳤다. 이부영과 정정봉이 썼다는 ‘자술서’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들의 자술서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을뿐더러, 나는 ‘모택동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닷새 동안 버텼다. 그들은 주로 야간에 두세 차례에 걸쳐 야전침대의 각목으로 엉덩이와 종아리를 장작 패듯 두들겼다. 낮에는 이미 썼던 내용을 쓰고 또 쓰라는 명령이 계속됐다. 몽둥이찜질 사흘째가 되자 온통 피멍이 들었고, 그 위에 다시 매질을 해서 쓰리고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모진 고문 닷새 만에 나는 항복했다. 다른 친구들이 썼다는 자술서를 거의 그대로 베꼈다. 그렇게 나는 ‘모택동주의자’가 됐다.
1975년 9월로 접어들었지만 해직사태는 이렇다 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투쟁 방식의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9월8일 동아투위는 덕수궁에서 총회를 열어 결성 6개월이 되는 9월17일에 회사 앞 침묵시위를 접고 각기 생활 전선에 뛰어들기로 했다. 시국도 불안했지만, 실직 상태가 반년 넘게 이어지면서 생활고를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요인이 컸다. 그날 이후 안종필과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업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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