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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바스켓 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정선민(51)은 한국 여자 농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코트 위에 선 여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최고로 군림했던 그는 1998년 여자프로농구(WKBL) 출범 이후에도 2012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7차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고, 몸담았던 팀 대부분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프로농구에서 415경기를 뛰면서 8140점을 기록했다. 경기당 19 전세자금대출 신청 .61점꼴이다. 3142리바운드(평균 7.57), 1777어시스트(4.28개), 771스틸(1.86개) 등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등 못 하는 게 없었다. 트리플 더블도 8차례나 기록했다.



현역 시절 정선민은 코트에서 당할 선수가 없는 선수였다. 그는 여자프로농구 MV 우리은행영세민대출 P만 7차례 차지했다. 동아일보 DB



그가 한국 여자 농구 역사상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중학교 시절까지는 볼품없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또래 중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부로 뽑혔다 고금리전환대출 . 그런데 막상 농구팀에 가보니 작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그는 가드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생이 돼서 키가 좀 큰 뒤에는 포지션을 포워드로 바꿨다. 본격적으로 센터를 맡은 건 고교 입학 후였다.
포지션이 자주 바뀌었다는 건 주전이 아니었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타고난 천재였을 것 같지만 중학생까지만 해도 그는 ‘ 대학성적 미운 오리’ 같은 선수였다.
정선민은 “많은 분들이 내가 처음부터 농구를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엔 내 역할은 ‘볼 보이’였다”면서 “얼마나 실력이 형편없었던지 중학교에 진학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농구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고집을 부려 중학교 농구부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중학교 3학년을 카드순위 마칠 때까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내버려 졌다. 팀의 일원이라고 느낄 때는 단체로 체벌을 받을 때가 유일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무대에 진출한 정선민의 모습. 동아일보 DB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던 그는 ‘독학’으로 농구를 익혔다. 그의 롤모델은 당시 남자 농구에서 맹활약 중이던 ‘슛도사’ 이충희였다. 그는 TV에서 본 이충희의 폼을 흉내 내면서 틈나는 대로 슛 연습을 했다. 두 손으로 슛을 하는 여느 여자 선수들과 달리 정선민이 남자 선수들처럼 한 손 슛도 종종 구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최동원 당시 마산여고 감독이었다. 최 감독은 중3이던 정선민에게 마산여고에 가서 언니들과 훈련을 하라고 지시했다. 얼떨결에 언니들과 훈련을 하게 된 그는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혼나기않기 위해, 또 언니들을 따라잡기 위해 더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쉬는 날도 아빠와 함께 체육관에 가서 혼자 슛을 던졌다.
그가 ‘백조’로 다시 태어난 것은 고교생이 되어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출전한 정식 경기에서 혼자 32점을 넣은 것이다. 농구계에선 ‘어디서 이런 선수가 갑자기 튀어나왔느냐’며 난리가 났다. 이후 그의 농구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정선민은 “어릴 적 키가 작고 농구를 못했던 게 어찌 보면 축복이었다. 덕분에 다양한 포지션에서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고, 공도 잘 다룰 수 있게 됐다”며 “고교 이후 센터를 맡으면서도 스틸을 잘했다. 어릴 적 가드를 하면서 공격의 흐름을 볼 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중학생 때까지 아무것도 아닌 나를 알아봐 준 그 선생님 덕분에 농구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여자 농구 대표팀 감독 시절 정선민(오른쪽)이 박지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선민은 한국 선수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진출 1호, 박지수는 2호다. 정선민 제공



정선민은 2003년 한국 여자 농구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무대에도 진출했다. 1라운드 8순위로 시애틀 스톰의 지명을 받은 그는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평균 6.9분 17경기 출전에 평균 1.8득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미국 생활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선민은 “나는 한국, 또는 아시아에서 좀 잘하는 선수였을 뿐 세계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포지션 변경도 어려웠고, 통역이 없어 말도 통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제 농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6개월이었다. 꿈을 그리던 미국 무대에 도전함으로써 세계적인 선수들의 마인드를 배울 수 있었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선수 시절 여러 차례 과감한 도전을 했던 그는 지도자로서도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중이다. 선수에서 은퇴한 뒤 그가 지도자로서 가장 먼저 맡았던 팀은 남자 학교인 인헌고였다. 지금은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도 경험한 학교가 됐지만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인헌고는 선수층도 얇고, 실력이 좋은 선수가 거의 없던 학교였다. 선수 때는 승리가 훨씬 익숙했던 정선민이었지만 지도자 첫해엔 연전연패를 당했다. 정선민은 “농구를 좋아하지만 실력이 다소 떨어지는 아이들이 모인 팀이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더라도 농구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며 “감사하게도 선수들이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잘 따라줬다. 당시 선수들 중 지금도 연락을 하는 아이가 있다. 1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지냈다”고 했다. 정선민은 이후 WKBL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한국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의 정선민의 모습. 동아일보 DB



2021년에는 공모를 통해 한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최근 들어 전력이 크게 약해진 한국 여자 농구 대표팀은 2022년 월드컵에서 중국과 미국에 큰 점수 차로 패했고, 2023년엔 아시아컵 4강에 실패하며 파리 올림픽 출전권도 놓쳤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선민은 이에 대해 “대표팀 감독을 처음 맡을 때부터 ‘독이 든 성배’라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독이건 약이건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기에 도전을 했다”며 “아름다운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 여자 농구가 가진 전력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생각한다. 2년간 정말 많은 공부를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선민은 요즘도 피트니스센터에서 근력 운동에 한창이다. 사진은 레그 익스텐션을 하는 모습. 동아일보 DB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떠난 후 그는 요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면서 간간이 농구 봉사에 나서기도 한다. 지난 연말에는 한국농구연맹(KBL)이 강원 양구에서 연 ‘유스 엘리트 캠프’에 코치로 참여했다. 한국중고농구연맹 소속 남자 중학교 3학년 엘리트 학생 선수 102명을 세 조로 나눠 2박 3일간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양동근 등 은퇴 선수 출신 지도자들이 참석한 이 캠프에서 정선민은 유일한 여성 코치였다. 센터 유망주들의 멘토로 나선 그는 “대표팀 감독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었는데 자라나는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에너지 레벨이 한껏 충전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 과도한 운동을 한 탓에 그는 발목과 허리가 좋지 않다. 하지만 이를 이겨내는 것 역시 운동이다. 이틀에 한 번은 단지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두시간 가량 운동을 한다.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트레드밀 위에서 땀을 낸 후 하체와 허리 위주로 근력 운동을 한다. 윗몸 일으키기 100개는 거뜬하다. 그는 “근력이 떨어지면 바로 통증이 온다. 좋지 않은 관절은 근력으로 버텨야 한다”며 “인생 100세 시대라고 하지 않나. 남은 50년 동안 꾸준한 운동으로 아프지 않게 살고 싶다”며 웃었다.



정선민의 최근 모습. 정선민 제공


농구 외엔 별다른 취미가 없는 그는 요즘도 온통 농구 뿐이다. 오전엔 미국프로농구(NBA)를 보고, 저녁 시간에는 남녀 프로농구를 시청하며 공부를 한다. 정선민은 “언젠가는 프로 팀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해 보고 싶다”며 “평생을 농구인으로 살아온 만큼 농구에서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선수들을 가르칠 곳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서 힘 닿는 데까지 가르쳐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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