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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중국 대사관 근무 시절 민족주의 운동 영향으로 ‘조국행’ 세 딸 낳고 남파 임무 부여받아 400㎞ 행군훈련 등 4년 밀봉교육
남한 법정 사형 구형에 최후진술 “고대동서교류사 원고 살려달라” 석방 뒤 하루 서너시간 자며 집필 학문 열정으로 세상 구석구석 답사
정수일 선생(1934~2025·2·24)의 삶은 여정이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구석구석을 살피고, 분단 국가의 통일을 염원하며 남북을 오갔다. 학문의 열정으로 세계를 답파한 여로는 상세히 알려진 것이고, 통일의 열망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넘나든 남북의 길은 가려진 것이었다. 햇빛 속에서든 달빛 아래서든 걸 서민전세자금대출이자연말정산 었다. 소걸음으로 천리가 아니라 수만리를 걸었다. 선생이 걷지 않고 뛴 것은 아마도 두 번 정도였을 것이다. 한 번은 보이는 곳에서, 다른 한 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옌볜의 쯔신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중국의 산골이었지만, 공식적으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이었고, 일상의 터전으로서는 함경도 유민의 집성촌 전세금반환청구권 이었다. 집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했고, 밖에 나가면 중국어가 들렸고,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다. 화전민의 아들로 부근의 룽징에서 고급중학교를 다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전국 통일시험 제도가 시행되면서 시골 출신도 먼 도시의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베이징대학을 지원하고, 거주지에서 시험을 치렀다. 발표는 어떻게 하는지 알 카드대금 연체 지도 못하는 가운데, 백양나무가 늘어선 비탈의 밭에서 아버지 일을 도왔다. 어느 날 멀리 실오라기 같은 개천 너머 행정사무소에서 누군가 황급히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손을 흔들며 무어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신문의 합격자 명단에서 정수일의 이름을 발견한 중학교 교사가 행정사무소에 전화로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그도 달렸다. 미래가 그곳에 있다는 듯, 밭을 가 중개수수료 계산 로질러 달렸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저우언라이와 나세르가 만나 문화교류협정을 체결했다. 중국에서는 국비유학생 두 명을 카이로대학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3학년인 그가 선발되어 조기 졸업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알제리 해방운동을 목격하면서 세계정세에 눈을 떴다. 전도양양한 외교관으로 성장하며 순탄한 길을 걷는가 했는데, 모로코 대 클럽대출 사관 근무 시절부터 고민에 빠졌다. 종전 후 일어나기 시작한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조선족 청년들 사이에서 환국파와 해외잔류파로 나뉜 논쟁이 최고조에 이를 때였다. 그는 외교부장 천이와 담판을 벌여 승낙을 얻었다. 조선족 동료들이 도강할 때, 그는 최초로 적법한 절차를 거쳐 중국 국적을 이탈한 다음 기차를 타고 조국으로 갔다.
평양의 아랍어 교수 생활은 보람찼다. 그가 머물렀던 시기의 북한 경제 사정은 남쪽보다 많이 나았다.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할 수 있었다. 세 딸을 낳고 10년을 넘길 즈음, 그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해외 아카데미를 거점으로 하는 특수공작원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기가 처한 시대적 상황의 명령이자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한쪽의 이념에 치우친 가치관에 갇혔을지라도, 통일을 위한 광야에 직접 나선다는 열정으로 타올랐다. 그때부터 평양을 떠날 때까지 4년 동안 밀봉교육을 받았다. 체력훈련은 400㎞ 행군이었다. 백두산 기슭에 도달하면, 거기서부터 정상까지는 뛰어서 올랐다.



2005년 중국 시안 서문 밖 실크로드 시발 기념비 앞에 선 정수일 교수. 당시 고인은 30여년 만의 답사에 어린아이처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실크로드는 물류 통로 이전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닦여진 길”이라며 “옛적 미지의 인간들 사이의 감정과 사상을 나눈 흔적들을 새삼 더듬는 것은 답사의 또다른 기쁨”이라고 말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2005년 톈안먼(천안문) 앞에 선 고인. 이종근 선임기자


레바논 출신에 필리핀 여권으로 입국하여 한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문명교류학자가 남파 간첩이었다는 공안 기관의 발표가 일반 국민에게는 충격이었지만, 시국 사건에 익숙한 법률가들은 달랐다. 변론을 맡기로 한 변호사 박원순이 접견을 가서 안심시키려는 듯 인사말처럼 한마디 건넸다. “보도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그가 변호사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아닙니다. 전부 사실입니다.” 공안 검찰과 맞서기 위해 전의를 가다듬던 박 변호사는 할 일이 없어졌고, 그 뒤로 실제 변론은 변호사 김한수가 도맡았다.
그는 남한에서 40년 넘게 지내면서 이념을 이유로 누구와 맞서 싸워본 일이 없다. 사회주의건 자유주의건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 일조차 전무하다. 호사가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면 언제나 통일론으로 슬쩍 넘겼다. 그 부분에 관한 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일관된 그의 태도를 보는 눈도 상반된 두 종류였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존경심을 표했다. 보수 언론인들은 전향자의 모호함으로 이해했다.
법정에서 사형이 구형되었음에도, 그는 최후진술에서 압수된 컴퓨터에 저장된 고대동서교류사 원고를 살려달라고 했다. 교도소에서는 흐릿한 조명 아래서 심야까지 아랍어 사전을 펼치며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번역했다. 가석방된 다음 날 찾아간 곳은 출판사였다. 실크로드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지나간 유행처럼 잦아들었지만, 그가 남긴 저술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0개국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공부에 열중했던 그는 비록 만인의 영웅은 아니지만 학자로서 전범 하나는 보여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지금 이 시간에도 창비 편집실에서는 그의 마지막 대작 ‘문명교류학 개론’ 원고를 다듬는 중이다. 의료인 출신으로 36년을 함께한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쇼트 슬리퍼(선천적으로 잠을 적게 자는 사람)였다.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도 종일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2011년, 60년 만에 고향으로 갔다. 옌지 공항에서 어머니 같은 누님을 50년 만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여행 중에 백두산으로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경력을 아는 모종의 힘이 작동했던지, 안내자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는 그날 하룻밤을 천지 물가의 중국군 막사에서 묵었다. 특별한 배려로 고무보트를 타고 수면의 가운데까지 갔다. 보이지 않는 북한의 국경이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선생은 평생을 묵묵히 걸어왔다. 뭔가 조금 남은 것이 있는 듯한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천지 수면의 마지막 절반처럼, 해 질 무렵에서 일몰까지를 남겨 두었다. 그 과제를 선생의 뒤에 남은 모든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선생이나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선생의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다.
차병직/변호사·법률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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