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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호 여성 벤처 기업가 곤노 유리(今野由梨). 올해 88세 ‘현역’ 기업인이다. 벤처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1969년. 전화기 2대로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 첫 벤처기업 다이얼서비스를 일구며 일본 사회를 바꿨다. “일본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손정의(孫正義·일본명 손마사요시)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말할 정도로 그는 일본에서 벤처 창업 기틀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故) 도요다 쇼이치 신규자영업자대출 로(豊田章一郞) 토요타 전 회장,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까지 방대한 ‘황금 인맥’을 자랑하지만, 정작 그의 통장엔 우리돈 수만원 가량만이 들어있다고 했다. “사람이 진짜 재산”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지난달 3일 들어봤다.
통장에 든 돈이 정말 수천엔이냐고 다시 묻자 그가 “돈은 숫자에 불과하다”며 웃었다. “간혹 돈을 통장에 창업 넣어서 이불 밑에 쌓아두다 세상을 뜨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며 입을 뗐다. “돈보다 도전할 일이 있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냈다는 자부심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반문도 했다. 창업한 지 올해로 55년. 그는 번 돈을 모두 엔젤투자자로 회사 명의로 타 벤처에 투자하거나 네팔 등지에서의 우물 파기 사업, 40명이 넘는 아이들 후원에 사용하고 있다고 창업진흥원원장 했다.



지난달 일본 지바에서 만난 곤노 유리 다이얼서비스 대표. 김현예 특파원


처음부터 사업을 꿈꾼 건 아니었다. 쓰다주쿠(津田塾)대 졸업 후 구직 활동에 나섰지만 입사 시험서 번번이 떨어졌다. ‘왜 나한테 이런 구미직장인밴드 일이 벌어지나’ 한탄을 하다, 하루에 4개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안에 회사를 차리겠다’는 꿈을 세웠다. 길을 터준 건 미국이었다. 1964년 미국서 열린 세계박람회 일에 지원했는데 덜컥 채용됐다. 미국 땅에서 우연한 기회에 둘러본 콜센터 회사. 전화로 상품과 관련된 설명을 담당하는 곳을 본 그는 꿈을 키웠다. 5년 뒤 33살의 나이로 모아드림캐피탈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24시간 전화 비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창업이었다.
하지만 월 3000엔의 첫 회원을 모집하는 데만 반년이 걸릴 정도로 순탄치 않았다. 새 방향이 생겨난 건 1971년의 일이다. 육아 스트레스를 못 견딘 부모가 아이를 유기하는 사건이 늘어나자 “엄마들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육아 상담 전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아기 110번’. (110은 일본 경찰신고 전화번호다) 전례 없는 서비스에 전화는 폭주했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규제 때문에 전화 요금에 서비스 비용을 얹어 청구할 수가 없었다. 십수년에 걸친 규제와의 싸움 끝에 요금 제도는 1988년에서야 바뀌었다. 그는 ‘안 먹는 아이 110번’, 어르신을 위한 ‘황혼 110번’과 같은 특화한 상담 서비스로 폭을 넓혔다. 소셜 비즈니스 형태로 업태를 바꾼 다이얼서비스는 지금도 학대, 심리 상담 서비스 등을 담당하고 있다. 곤노 대표는 “비즈니스 덕에 일본 전역의 아이들과 엄마들, 어르신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손 회장과의 인연을 묻자 그는 주저하며 옛 얘기를 꺼냈다. 21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건 40여년 전. “규제를 바꿔보려다 금융심의회 등 여러 정부 심의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당시 갓 사업을 시작한 손 회장에게 사람들을 소개해준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인연 덕에 손 회장 동생인 손태장 미슬토 회장이 그의 회사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사람을 재산으로 만드는 비결을 묻자 그는 “남이 뭐라 하든 바른 말을 잃지 않고,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듣기 좋은 소리로 ‘타협’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그는 “올해 88세지만 회사를 ‘졸업’할 생각은 없다”면서 “일하기에 정말 좋은 나이가 됐다. 내 인생이 끝날 때 참 열심히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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