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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 시어터 앞, 역대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이 새겨진 기둥 / 사진. © 임희윤
‘1939… 1959… 1965… 2019…’
아르 데코 양식의 돌기둥 12개에 숫자의 산업활동동향 연쇄가 적혀 있었다. 이것들은 내게 마치 고대의 기념비처럼 다가왔다.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나 이집트의 기자에서 마주하는 문명의 모놀리스(monolith)처럼 압도적으로 시야를 침공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저 숫자 하나하나의 아래에 새겨져 있는 각각 다음과 같은 문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Gone with the Wind(바람과 함께 새희망홀씨 거절 사라지다)… Ben-Hur(벤허)… The Sound of Music(사운드 오브 뮤직)… Parasite(기생충)…’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 모두 기록된 이곳은 돌비 시어터의 입구다. 세계 영상과 음악 산업의 메카, 할리우드의 중심에 위치한 유서 깊은 극장. 이곳은 매년 오스카 시상식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2020년 초, 한 제2금융권순위 국 영화 최초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기생충’도 바로 이 안에서 트로피를 추켜올렸다.
11월 21일(현지 시각) 오후 이곳에는 이미 라이즈, 투어스, 아일릿 등 케이팝 그룹을 응원하는 문구를 한글로 적은 현지 다인종, 다문화의 팬이 운집해 있었다. 이날 저녁 열릴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에 몇 시간 앞서 대기 줄을 선 것이 영어수업진행 다.
한국과 아시아의 대표적 대중음악 시상식인 MAMA는 이날 새 역사를 쓸 참이었다. ‘한국의 메이저 시상식 최초의 미국 현지 개최’. 한국 가요 시상식을 미국에 날아가서 한다고? 어쩌면 무모하게도 보이는 이 도전은 몇 년 전부터 예비됐다.
거의 정확히 3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2021년 11월, 나는 세계적인 라 개인파산신청기간 디오 DJ 제인 로(Zane Lowe)를 인터뷰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로는 21세기 대표 라디오 DJ다. 20세기로 치면 미국의 하워드 스턴이나 딕 클라크, 영국의 존 필에 비견할 수 있다. 2003년부터 12년간 영국 BBC 라디오 1채널의 황금시간대 진행자였다. 2015년부터는 애플뮤직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애플뮤직 라디오의 대표 DJ로 활약 중이다.
라디오 DJ 제인 로(Zane Lowe) / 사진출처. © Apple / Apple Music for Artists
그해 MAMA가 애플뮤직과 협업한 것을 계기로 만난 그는 내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몇 년 전 차를 몰고 할리우드 대로로 접어드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제 열한 살짜리 아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더군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케이팝을, 뜻도 모르는 한국어 가사로 완벽하게 말이죠!”
그 순간을 그는 “매직!”으로 회고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연했다. “번역조차 필요 없이 태평양을 건너버린 이 음악(케이팝)이 곧 모든 이의 가슴에 닿으리라고 그때 직감했죠.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저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런 걸 우린 마법이라 부르지 않나요?”
그는 당시 MAMA의 미래에 대해서 “한국의 음악은 이미 국가와 대륙의 경계를 넘었다. 영화, 패션과 함께 세계인의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미국에 온다고 해도 홈런을 치리라 확신한다”라고도 말했다.
꼭 3년 만에 그 말은 거의 현실이 됐고, 나는 그 역사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날 난 돌비 시어터 건너편에 있는 ‘멜스 드라이브 인 할리우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1980, 90년대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할리우드의 레코드 플랜트나 오션 웨이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다 허기가 지면 새벽에 앙투라지(entourage)와 기습적으로 들러 버거를 들어 올렸다는 곳이다.
보도로 나서자, 할리우드 워크 오브 페임, 즉 별의 거리가 나를 반겼다. 월트 디즈니부터 프랭크 시내트라, 존 레넌까지 다양한 스타의 이름 위로 시민들이 무심히 지나갔다. 땅을 보고 걷다 문득 고개를 드니 수많은 레코드판을 쌓아 올린 듯 신기한 모양의 캐피톨 음반사 사옥, 그리고 저 멀리 할리우드 사인이 선뜻하게 보인다.
돌비 시어터 외벽 전광판에 등장한 MAMA 예고 / 사진제공. © CJ ENM
세계 대중문화의 ‘은하수’가 드리운 이곳의 심장부에서 잠시 후 열릴 MAMA는 어떤 모습일까. 소요하던 발걸음을 재촉해 다시 돌비 시어터로 돌아왔다. 시상식장 좌석은 이미 현지 케이팝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3,300석. 약 7만 석의 일본 닛산 스타디움이나 서울 잠실주경기장에 비하면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이지만, 반원 모양의 돌출형 발코니가 빼곡히 고개를 내민 고풍스러운 양식의 극장은 그 고전적 위엄이 상당했다.
배우 박보검의 진행으로 시작한 MAMA는 첫 시상부터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87세의 원로 배우 더스틴 호프먼이 남자 신인상을 건네러 나온 것이다. 앞서 저 돌기둥에 새겨 있던 1979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1988년 ‘레인 맨’의 주연으로 오스카상을 들어 올렸던 인물이다. 이젠 고전이 된 ‘빠삐용’부터 ‘졸업’ ‘투씨’, 그리고 쿵푸팬더의 마스터 시푸 목소리 연기까지. 할리우드와 빌보드가 우리네 학생들의 ‘교양필수’이던 시절, 그야말로 달달 외던 필모그래피의 주인공 아닌가. 그가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의 투어스에게 신인상 트로피를 쥐여 주는 장면부터 이날 저녁의 현실감은 할리우드 사인이 자리한 산타 모니카 산맥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2024 MAMA 어워즈' 시상자, 배우 더스틴 호프먼 / 사진제공. © CJ ENM
'2024 MAMA 어워즈'에서 남자 신인상 받은 투어스 / 사진제공. © CJ ENM
아일릿, 라이즈, 투어스 등 풋풋한 신인들의 이어진 수상과 축하 공연은 돌비 시어터에 드리웠던 할리우드 영화의 환상적 은막을 ‘K-청량감’으로 확 제쳐 버렸다. 그중 영파씨의 무대는 괄목할 만했다. 특히 그들이 ‘XXL’의 둔중한 인트로와 함께 춤과 랩을 선보일 때 그랬다. ‘XXL’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1994년 히트곡 ‘Come Back Home’을 오마주한 곡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누구인가. 학계와 평단은 케이팝의 출발점을 1996년 H.O.T. 데뷔로 본다. 그렇다면 서태지는 그 ‘빅뱅’을 예비한 프로토(proto-)케이팝의 선지자 격이다.
1990년대 초중반 당시만 해도 한국 팝의 교과서는 미국 팝이었다. 젊은 파격을 원했던 서태지에게 특히 그 주요 텍스트 중 하나는 미국 힙합. ‘Come Back Home’은 갱스터 랩에서 양분을 빨아들였다. 다름 아닌 이곳 돌비 시어터를 감싼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생겨난 장르다. 저 ‘Come Back Home’의 반음계 베이스 진행이 나오는 순간, 난 그래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전류 비슷한 걸 느낀 것이다. ‘30년 전, 서태지에게 영향을 준 LA는 그 생각지도 못한 나비효과의 씨앗을 자신도 모른 채 이역만리 동양인이 들고 온 결실로 돌려받고 있다….’
이날 저녁 할리우드 돌비 시어터에서 열린 MAMA / 사진제공. © CJ ENM
미국 현지 오디션을 통해 뽑힌 캣츠아이(KATSEYE)의 무대도 의미심장했다. 미국인들이 야구, 농구보다 더 사랑하는 최고의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현지 연고 프로 팀인 ‘로스앤젤레스 램스’의 치어리더들과 함께 꾸민 것이다. 램스의 치어리더들이 화려한 퍼포먼스의 사이사이에 한글 응원 문구를 만들어 보이고, 캣츠아이는 마치 그들과 같은 바다의 한 물결처럼 섞여 케이팝적인 아크로바틱 칼군무를 선보이는 장면은 문화적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심리적 입체성으로도 감각돼 다가왔다.
박진영과 앤더슨 팩이 꾸민 마지막 무대도 다층적 의미망을 이 고전적 극장 위로 펼쳐놨다. 위트 있는 ‘밀양 박씨 콜라보’라는 부제 때문만은 아니다. 앤더슨 팩이 누구인가. 로제와 함께 근래 세상을 뒤집어 놓은 브루노 마스, 그와 함께 듀오 실크 소닉을 결성해 그래미 다관왕을 목에 건 다재다능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랩도 보컬도 악기 연주도 자유자재인 멀티인스트루멘털리스트이다. 그의 한국인 할머니는 6·25에 참전한 미군과 결혼해 훗날 앤더슨 팩의 어머니가 될 딸을 낳았다. 앤더슨 팩의 ‘팩’은 그래서 정확히 ‘박’이다.
박진영은 또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9년, 원더걸스 멤버들과 태평양을 건너와 맨땅에 헤딩하며 미국 프로모션을 진행해 결국 ‘Tell Me’를 빌보드 핫100의 76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원더걸스 원정 이후 15년. 2024년 케이팝 신인들을 몰고 함께 온 올해 박진영의 MAMA 무대는 그래서 그에게도, 한국 음악업계 종사자들에게도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시상자와 수상자, 드러머이자 건반 연주자로 무대에 함께 선 앤더슨 팩(왼쪽)과 박진영 / 사진제공. © CJ ENM
더구나 박진영이 등장하기 전부터 현지 케이팝 팬들은 “JYP! JYP!”를 장내가 떠나가라 하고 연호했다. 원더걸스부터 미쓰에이, 있지, 트와이스까지 수많은 케이팝 히트곡의 인트로에 실려 있던 저 ‘JYP!’ 하는 시그니처 오디오 때문에 그는 현지의 젊은 한국 음악 팬들에게 마치 케이팝의 오래된 구루(guru)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그녀는 예뻤다’ ‘허니’ 등 박진영의 히트곡들이 품은 20세기 미국풍의 솔(soul)과 그루브(groove)가 앤더슨 팩의 출렁이는 드러밍을 만날 때, 케이팝과 팝의 경계는 어느새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그제야 문득 올해 MAMA의 슬로건이 떠올랐다. ‘BIG BLUR : What is Real?’
2020년대 들어 확장현실(XR)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한 MAMA는 시상식을 넘어 케이팝 최고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쇼로 자리를 굳혔다. 이제 또 다른 경계가 무너진다. 또 다른 국경이 흐물흐물해진다.
이날 마지막 무대를 함께 꾸민 앤더슨 팩과 박진영 / 사진제공. © CJ ENM
[2024 MAMA 어워즈 - '박진영: Easy Lover(아니라고 말해줘) with. 앤더슨 팩']
‘2024, 2025, 2026, 2027… 2070, 2071’
돌비 시어터를 나오며 돌기둥에 마저 새겨진 또 다른 숫자들의 연쇄를 보았다. 미래에 새겨질 그 아래 수상작 제목은 물론 아직,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 할리우드 워크 오브 페임을 걸으며 봤던, 내용이 비어 있는 별들도 떠올랐다. 앞으로 이 거리에 어떤 K가 울려 퍼질까. 어떤 K가 새겨질까. ‘시대와 함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양태는 바뀐다. 스타의 정의와 얼굴도 바뀌어 간다.’ 이런 상념과 만감 속에 할리우드의 밤은 깊어만 갔다.
돌비 시어터 앞, 아직 빈 칸으로 남겨져 있는 기둥 / 사진. © 임희윤
임희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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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 시어터 앞, 역대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이 새겨진 기둥 / 사진. © 임희윤
‘1939… 1959… 1965… 2019…’
아르 데코 양식의 돌기둥 12개에 숫자의 산업활동동향 연쇄가 적혀 있었다. 이것들은 내게 마치 고대의 기념비처럼 다가왔다.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나 이집트의 기자에서 마주하는 문명의 모놀리스(monolith)처럼 압도적으로 시야를 침공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저 숫자 하나하나의 아래에 새겨져 있는 각각 다음과 같은 문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Gone with the Wind(바람과 함께 새희망홀씨 거절 사라지다)… Ben-Hur(벤허)… The Sound of Music(사운드 오브 뮤직)… Parasite(기생충)…’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 모두 기록된 이곳은 돌비 시어터의 입구다. 세계 영상과 음악 산업의 메카, 할리우드의 중심에 위치한 유서 깊은 극장. 이곳은 매년 오스카 시상식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2020년 초, 한 제2금융권순위 국 영화 최초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기생충’도 바로 이 안에서 트로피를 추켜올렸다.
11월 21일(현지 시각) 오후 이곳에는 이미 라이즈, 투어스, 아일릿 등 케이팝 그룹을 응원하는 문구를 한글로 적은 현지 다인종, 다문화의 팬이 운집해 있었다. 이날 저녁 열릴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에 몇 시간 앞서 대기 줄을 선 것이 영어수업진행 다.
한국과 아시아의 대표적 대중음악 시상식인 MAMA는 이날 새 역사를 쓸 참이었다. ‘한국의 메이저 시상식 최초의 미국 현지 개최’. 한국 가요 시상식을 미국에 날아가서 한다고? 어쩌면 무모하게도 보이는 이 도전은 몇 년 전부터 예비됐다.
거의 정확히 3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2021년 11월, 나는 세계적인 라 개인파산신청기간 디오 DJ 제인 로(Zane Lowe)를 인터뷰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로는 21세기 대표 라디오 DJ다. 20세기로 치면 미국의 하워드 스턴이나 딕 클라크, 영국의 존 필에 비견할 수 있다. 2003년부터 12년간 영국 BBC 라디오 1채널의 황금시간대 진행자였다. 2015년부터는 애플뮤직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애플뮤직 라디오의 대표 DJ로 활약 중이다.
라디오 DJ 제인 로(Zane Lowe) / 사진출처. © Apple / Apple Music for Artists
그해 MAMA가 애플뮤직과 협업한 것을 계기로 만난 그는 내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몇 년 전 차를 몰고 할리우드 대로로 접어드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제 열한 살짜리 아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더군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케이팝을, 뜻도 모르는 한국어 가사로 완벽하게 말이죠!”
그 순간을 그는 “매직!”으로 회고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연했다. “번역조차 필요 없이 태평양을 건너버린 이 음악(케이팝)이 곧 모든 이의 가슴에 닿으리라고 그때 직감했죠.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저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런 걸 우린 마법이라 부르지 않나요?”
그는 당시 MAMA의 미래에 대해서 “한국의 음악은 이미 국가와 대륙의 경계를 넘었다. 영화, 패션과 함께 세계인의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미국에 온다고 해도 홈런을 치리라 확신한다”라고도 말했다.
꼭 3년 만에 그 말은 거의 현실이 됐고, 나는 그 역사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날 난 돌비 시어터 건너편에 있는 ‘멜스 드라이브 인 할리우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1980, 90년대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할리우드의 레코드 플랜트나 오션 웨이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다 허기가 지면 새벽에 앙투라지(entourage)와 기습적으로 들러 버거를 들어 올렸다는 곳이다.
보도로 나서자, 할리우드 워크 오브 페임, 즉 별의 거리가 나를 반겼다. 월트 디즈니부터 프랭크 시내트라, 존 레넌까지 다양한 스타의 이름 위로 시민들이 무심히 지나갔다. 땅을 보고 걷다 문득 고개를 드니 수많은 레코드판을 쌓아 올린 듯 신기한 모양의 캐피톨 음반사 사옥, 그리고 저 멀리 할리우드 사인이 선뜻하게 보인다.
돌비 시어터 외벽 전광판에 등장한 MAMA 예고 / 사진제공. © CJ ENM
세계 대중문화의 ‘은하수’가 드리운 이곳의 심장부에서 잠시 후 열릴 MAMA는 어떤 모습일까. 소요하던 발걸음을 재촉해 다시 돌비 시어터로 돌아왔다. 시상식장 좌석은 이미 현지 케이팝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3,300석. 약 7만 석의 일본 닛산 스타디움이나 서울 잠실주경기장에 비하면 2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이지만, 반원 모양의 돌출형 발코니가 빼곡히 고개를 내민 고풍스러운 양식의 극장은 그 고전적 위엄이 상당했다.
배우 박보검의 진행으로 시작한 MAMA는 첫 시상부터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87세의 원로 배우 더스틴 호프먼이 남자 신인상을 건네러 나온 것이다. 앞서 저 돌기둥에 새겨 있던 1979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1988년 ‘레인 맨’의 주연으로 오스카상을 들어 올렸던 인물이다. 이젠 고전이 된 ‘빠삐용’부터 ‘졸업’ ‘투씨’, 그리고 쿵푸팬더의 마스터 시푸 목소리 연기까지. 할리우드와 빌보드가 우리네 학생들의 ‘교양필수’이던 시절, 그야말로 달달 외던 필모그래피의 주인공 아닌가. 그가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의 투어스에게 신인상 트로피를 쥐여 주는 장면부터 이날 저녁의 현실감은 할리우드 사인이 자리한 산타 모니카 산맥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2024 MAMA 어워즈' 시상자, 배우 더스틴 호프먼 / 사진제공. © CJ ENM
'2024 MAMA 어워즈'에서 남자 신인상 받은 투어스 / 사진제공. © CJ ENM
아일릿, 라이즈, 투어스 등 풋풋한 신인들의 이어진 수상과 축하 공연은 돌비 시어터에 드리웠던 할리우드 영화의 환상적 은막을 ‘K-청량감’으로 확 제쳐 버렸다. 그중 영파씨의 무대는 괄목할 만했다. 특히 그들이 ‘XXL’의 둔중한 인트로와 함께 춤과 랩을 선보일 때 그랬다. ‘XXL’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1994년 히트곡 ‘Come Back Home’을 오마주한 곡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누구인가. 학계와 평단은 케이팝의 출발점을 1996년 H.O.T. 데뷔로 본다. 그렇다면 서태지는 그 ‘빅뱅’을 예비한 프로토(proto-)케이팝의 선지자 격이다.
1990년대 초중반 당시만 해도 한국 팝의 교과서는 미국 팝이었다. 젊은 파격을 원했던 서태지에게 특히 그 주요 텍스트 중 하나는 미국 힙합. ‘Come Back Home’은 갱스터 랩에서 양분을 빨아들였다. 다름 아닌 이곳 돌비 시어터를 감싼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생겨난 장르다. 저 ‘Come Back Home’의 반음계 베이스 진행이 나오는 순간, 난 그래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전류 비슷한 걸 느낀 것이다. ‘30년 전, 서태지에게 영향을 준 LA는 그 생각지도 못한 나비효과의 씨앗을 자신도 모른 채 이역만리 동양인이 들고 온 결실로 돌려받고 있다….’
이날 저녁 할리우드 돌비 시어터에서 열린 MAMA / 사진제공. © CJ ENM
미국 현지 오디션을 통해 뽑힌 캣츠아이(KATSEYE)의 무대도 의미심장했다. 미국인들이 야구, 농구보다 더 사랑하는 최고의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현지 연고 프로 팀인 ‘로스앤젤레스 램스’의 치어리더들과 함께 꾸민 것이다. 램스의 치어리더들이 화려한 퍼포먼스의 사이사이에 한글 응원 문구를 만들어 보이고, 캣츠아이는 마치 그들과 같은 바다의 한 물결처럼 섞여 케이팝적인 아크로바틱 칼군무를 선보이는 장면은 문화적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심리적 입체성으로도 감각돼 다가왔다.
박진영과 앤더슨 팩이 꾸민 마지막 무대도 다층적 의미망을 이 고전적 극장 위로 펼쳐놨다. 위트 있는 ‘밀양 박씨 콜라보’라는 부제 때문만은 아니다. 앤더슨 팩이 누구인가. 로제와 함께 근래 세상을 뒤집어 놓은 브루노 마스, 그와 함께 듀오 실크 소닉을 결성해 그래미 다관왕을 목에 건 다재다능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랩도 보컬도 악기 연주도 자유자재인 멀티인스트루멘털리스트이다. 그의 한국인 할머니는 6·25에 참전한 미군과 결혼해 훗날 앤더슨 팩의 어머니가 될 딸을 낳았다. 앤더슨 팩의 ‘팩’은 그래서 정확히 ‘박’이다.
박진영은 또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9년, 원더걸스 멤버들과 태평양을 건너와 맨땅에 헤딩하며 미국 프로모션을 진행해 결국 ‘Tell Me’를 빌보드 핫100의 76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원더걸스 원정 이후 15년. 2024년 케이팝 신인들을 몰고 함께 온 올해 박진영의 MAMA 무대는 그래서 그에게도, 한국 음악업계 종사자들에게도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시상자와 수상자, 드러머이자 건반 연주자로 무대에 함께 선 앤더슨 팩(왼쪽)과 박진영 / 사진제공. © CJ ENM
더구나 박진영이 등장하기 전부터 현지 케이팝 팬들은 “JYP! JYP!”를 장내가 떠나가라 하고 연호했다. 원더걸스부터 미쓰에이, 있지, 트와이스까지 수많은 케이팝 히트곡의 인트로에 실려 있던 저 ‘JYP!’ 하는 시그니처 오디오 때문에 그는 현지의 젊은 한국 음악 팬들에게 마치 케이팝의 오래된 구루(guru)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그녀는 예뻤다’ ‘허니’ 등 박진영의 히트곡들이 품은 20세기 미국풍의 솔(soul)과 그루브(groove)가 앤더슨 팩의 출렁이는 드러밍을 만날 때, 케이팝과 팝의 경계는 어느새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그제야 문득 올해 MAMA의 슬로건이 떠올랐다. ‘BIG BLUR : What is Real?’
2020년대 들어 확장현실(XR)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한 MAMA는 시상식을 넘어 케이팝 최고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쇼로 자리를 굳혔다. 이제 또 다른 경계가 무너진다. 또 다른 국경이 흐물흐물해진다.
이날 마지막 무대를 함께 꾸민 앤더슨 팩과 박진영 / 사진제공. © CJ ENM
[2024 MAMA 어워즈 - '박진영: Easy Lover(아니라고 말해줘) with. 앤더슨 팩']
‘2024, 2025, 2026, 2027… 2070, 2071’
돌비 시어터를 나오며 돌기둥에 마저 새겨진 또 다른 숫자들의 연쇄를 보았다. 미래에 새겨질 그 아래 수상작 제목은 물론 아직,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 할리우드 워크 오브 페임을 걸으며 봤던, 내용이 비어 있는 별들도 떠올랐다. 앞으로 이 거리에 어떤 K가 울려 퍼질까. 어떤 K가 새겨질까. ‘시대와 함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양태는 바뀐다. 스타의 정의와 얼굴도 바뀌어 간다.’ 이런 상념과 만감 속에 할리우드의 밤은 깊어만 갔다.
돌비 시어터 앞, 아직 빈 칸으로 남겨져 있는 기둥 / 사진. © 임희윤
임희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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