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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둘러싸인 채 우뚝 솟은 성당의 첨탑, 오른쪽 위 가장자리에 ‘N.S.Paik 1930’ 달필의 서명이 선명하다. 이건희컬렉션으로 세상에 알려진 ‘낙원’(1936)에 남아 있는 백남순(1904~94)의 서명과 일치한다. 또 다른 이국적 풍경화에도 왼쪽 가장자리에 백남순의 서명이 눈에 띈다. 낡고 벗겨졌지만 95년 된 그림의 가치를 반감시킬 정도는 아니다.



백남순이 1930년 프랑스에서 그린 풍경화. 사진제공 장태영


한국의 1세대 여성 화가 백남순의 프랑스 유학 시절 초기작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남아 있는 백남순 작품 중 가장 오랜 것이다. 화랑협회 감정평가위원회는 지난달 이 두 점을 진품으로 판정했다.



2011년의 프랑스 에르블레 성당 모습. 사진 Geoffroy GUE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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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순은 한국의 여성 화가로는 처음으로 파리에 유학했다. 미국 예일대 미대를 수석 졸업한 뒤 학교에서 보내준 연수를 와 있던 임용련(1901~50)과 파리 근교의 에르블레 성당에서 혼배 미사를 보고 이 마을에 신혼방을 차렸다. 새로 발견된 그림 속 풍경은 지금도 남아 있는 성당의 모습과 유사하다. 화가는 귀국해 평북 정 디딤돌대출 청약저축 주 오산학교에 영어ㆍ미술 교사로 부임한 임용련과 함께 미술반을 이끌며 이중섭ㆍ문학수를 가르쳤다.



백남순의 남편 임용련이 1930년 그린 '에르블레 풍경'. 두 사람의 신혼집 뒤로 보이는 마을 전경이라고 생전의 백남순이 돌아본 바 있다. 발견된 두 점은 이 그림과 같은 크기 생애최초 주택청약 의 하드보드지에 그린 유화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였지만 전쟁은 화가 부부의 꿈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피란길에 오르며 정주 고읍역 창고에 모아둔 두 사람의 그림은 포격으로 전소했다. 해방 후 서울로 온 임용련은 미군정에서 일하다 6ㆍ25 때 공산군에 처형됐다. 7남매를 데리 중국 브로커 고 부산으로 피란 간 백남순은 서울대 미대 강사로 지내다가 성심공민학교를 설립, 전쟁고아 구호와 빈민교육에 헌신했다. 의무교육 실시로 학교가 폐지된 후 1964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 갔다.



2021년 이건희컬렉션으로 기증된 백남순의 '낙원'(1936). 8폭 병풍으로 짠 캔버스에 이상화된 풍경을 그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잊혀진 화가’였던 그는 1981년 「계간미술」
(지금의 「월간미술」
) 인터뷰로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를 본 친구 민영순 씨가 전남 완도로 시집갈 때 백남순에게 선물 받았던 '낙원'과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의 존재를 알려왔다. '에르블레 풍경'은 백남순의 뜻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화랑협회 감정평가위원회는 한 달 여의 연구 끝에 지난해 11월 백남순의 풍경화 두 점을 진품으로 판정했다. 협회의 감정소견서. 사진제공 장태영


이런 연유로 6ㆍ25 전쟁 이전에 그려진 백남순 작품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낙원’이 유일했다. 캔버스로 짠 8폭 병풍에 상상 속 이상향을 그린 유화다. 화랑협회 감정평가위원인 홍익대 김이순 명예교수는 “에르블레 풍경이라는 소재와 달필의 서명, 무엇보다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과 같은 크기의 하드보드에 그린 유화라는 점이 진품 판정의 근거가 됐다”며 “돈이 될 만한 작품이 아니고, 프랑스에서 백남순을 알고 위조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라고 설명했다. 풍경화 속 서명은 ‘낙원’ 뿐 아니라 도록 속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1920년대), 양주동 시집 ‘조선의 맥박’(1932) 삽화 속 서명과도 일치한다.



양주동 시집 『조선의 맥박』(1932)에 백남순이 그린 삽화. 오른쪽에 ‘해농 백남순 여사 필’이라 적혀 있고, 그림 왼쪽 아래 그의 서명이 있다. 시집 장정은 임용련. 사진제공 장태영


감정을 의뢰한 장태영(45) 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연 첫 이건희컬렉션 전시 때 백남순의 ‘낙원’을 본 뒤 관심을 갖게 됐다. 올 2월 파리의 작은 경매(Auction Art Remy Le Fur & Associes)에서 그의 서명이 들어간 풍경화 두 점을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림과 가구, 오래된 책 등 여러 상속 물품이 나온 온라인 경매여서,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어딘가로 흩어졌을 것 같다”며 “소장자에 대해 여러 차례 물었지만, 경매사는 ‘파리에 사는 사람이 유품을 내놓았다’고만 답했다”고 덧붙였다.



서울 가명보통학교 교사 시절의 백남순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풍경'(1927). 사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미국에 사는 백남순의 막내아들 임대웅 씨는 올 초 장태영 씨의 연락을 받고 “피란통에 아버님의 프랑스 풍경화, 어머니의 ‘낙원’ 외에는 대부분 작품이 없어졌다. 에르블레는 파리 변방, 기차로 30분 거리 지역으로 그림 속 성당은 두 분이 혼배성사 받은 곳”이라며 기뻐했다.
지난해 중앙일보에 1930년대 ‘낙원’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전달한 백남순의 손녀 펠리시아 커밍스는 “놀라운 소식 전해줘 고맙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흥미로워할 작품 같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실장도 “미술관이 갖고 있는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과 이번에 나온 두 작품에는 물감과 색감 등에 시대의 화풍이 담겨 있다”며 “백남순 초기작 연구의 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낙원' 병풍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임용련, 둘째 선영, 셋째 선명을 안고 있는 백남순, 첫째 선애. 사진제공 유족


■ '벼룩시장에 나온 다 빈치 그림'…우리 근대미술에도 이런 극적 발견 있다
「 ‘창고에서 발견된 반 고흐 초기작’ ‘벼룩시장에 나온 다 빈치 그림’, 외신에 더러 나오는 극적인 발견이다. 드물게 유럽에서 수학한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들도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김이순 교수는 이번 발견에 대해 “배운성의 ‘가족도’만큼이나 극적이다”라고 말했다.



배운성의 ‘가족도’(140x200㎝).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사진 대전프랑스문화원


20세기 말 파리의 골동품상에서 한 유학생의 눈에 띈 월북 화가 배운성(1900~78)의 48점 이야기다. 일찌감치 아버지를 잃은 배운성은 서울의 갑부 백인기의 집사로 들어갔다. 1922년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독일 유학길에 몸종으로 동행했다. 백명곤은 건강상 문제로 급거 귀국했지만 배운성은 남아서 베를린예술종합학교에서 수학, 1927년 프랑스의 살롱 도톤에 한국인 최초로 입선하는 활약을 보였다.



배운성, 모자를 쓴 자화상, 1930년대, 54x54㎝, 캔버스에 유채. 사진 대전프랑스문화원


제2차 세계대전 전세가 악화하면서 그동안의 작품을 유럽에 남기고 1940년 급히 귀국한다. 월북으로 묻힌 이 화가의 재발견을 이끈 것은 골동품상에서 한복 차림 인물화들을 사들인 눈 밝은 소장가 전창곤 대전프랑스문화원장이었다. 」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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