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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가이드 펨바의 말에 미경은 고개를 숙였다. 이어 펨바는 "엄밀히 따져 등정 가능한 대원은 전체 중 2명, 잘하면 3명일 것"이라며 끝내 미경이 등정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은 해주지 않았다. 미경은 "완전히 의욕이 상실되던 순간"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났다. 결론적으로 펨바의 예언은 틀렸다. 메라 피크 정상에는 미경이 서 있었다. 미경은 "펨바의 예언에 순간 마음이 꺾였었지만, 오히려 그 말을 들으니 반드시 오르겠다는 각오가 섰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각오로 5일의 훈련을 거친 결과 메라 피크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디딤돌 금리첫 걸음 걷자 울음 터뜨린 여성 대원
계절로 치자면 겨울을 눈앞에 둔 늦가을인 60대. 바람에 찢기고 바스러져가는 낙엽과 같은 신세가 되기보다는 제때 줄기를 놓고 의연히 땅으로 떨어지는 단풍이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 8명이 히말라야 메라 피크(6,476m)를 목표로 의기투합했다.
메라 피크를 다녀온 효범 신차할부금리 (남, 75)을 총대장으로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이 있는 용봉(남, 68)과 성예(여, 60)를 각각 대장과 총무로 하고, 대원으로는 경신(여, 69), 나율(여, 65), 소현(여, 62), 미경(여, 60) 그리고 필자 승화(남, 65)로 하는 평균 나이 65세인 원정대가 꾸려졌다.
디딤돌대출 이자계산 체트라 라로 가는 중에 본 카르키텡과 그 아래의 추탕가.
2024년 12월 9일 네팔 카트만두에 들어섰다. 공항에서 나오니 현지 가이드인 펨바가 흰 가타와 메리골드로 만든 꽃목걸이를 우리들 목에 일일이 걸어주며 환영해 준다. 펨바는 서글서글한 눈매에 강인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삼성카드대환 30대 후반의 나이로 유능한 셰르파인 그는 한국어도 능숙해서 국내 등산 브랜드 블랙야크의 현지 앰버서더로도 활동하고 있다.
메라 피크 등반 출발지는 루클라다. 도착하고 가볍게 마을을 산책한 후 로지에서 첫 밤을 보냈다. 침낭을 펴고 뜨거운 물을 담은 물병을 안은 채 잠에 든다. 히말라야의 첫 밤이지만, 루클라는 해발고도 2,800m 고산 골든브릿지증권 지대라 저녁 때 이미 고소약(아세타졸)을 먹은 영향으로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거린 기억이 오히려 더 강하게 남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 첫걸음에 메라 피크를 향할 순 없었다. 먼저 고소적응 훈련을 해야만 했다. 목적지는 추탕가(3,020m). 루클라에서 겨우 200m 오르는 셈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
소레에서 고소적응 훈련. 아래쪽에 우리가 묵었던 소레 로지가 보인다.
주변의 산들은 모두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높고 거칠어 보인다. 길이나 제대로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길은 부드럽고 안온했다. 마치 시골길을 걷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서두르면 안 된다. 고산에선 아주 여유롭게 천천히 걸어야 고산병에 걸리지 않는다.
감동적인 풍경이 이어지는데 문득 나율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아마도 지난해 봄에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한국에 있을 땐 히말라야를 걸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가 현지에서 실제 걷게 되자 감정이 울컥하게 된 모양이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나율의 모습은 빛나 보였고 발걸음도 활기 있었다.
그런데 추탕가는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끈기 있게 5시간 정도 산행하니 그제야 겨우 추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200여 m 오르는데 이처럼 힘들 것 같지는 않아서 펨바에게 물었다. 고도계를 살펴본 펨바는 고도가 3,400m 넘게 나왔다고 한다. 고도를 600여 m나 올린 것이었다. 진짜 200m 오르는 데 그토록 힘든 것이었다면 전의가 꺾일 뻔했는데 다행이다.
개미지옥 같은 오르막 이어져
다음날 고소적응을 위해 체트라 라(4,660m)를 넘어 체트라 부(4,360m)에 있는 로지까지 트레킹했다. 4km 걷는 데 고도는 1,200여 m를 올려야 하니 그 가파른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길 위에 서니 실없이 웃음이 풀썩거리며 나온다. 쉴 평지 한 뼘 없이 오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3시간 정도 올라 카르카텡 로지 안에서 이른 점심을 하고 다시 또 가파른 오름짓을 시작했다. 개미지옥이 생각났다. 그곳에 빠진 개미처럼 오르고 또 올라도 계속 오르막만 나타난다.
이미 고도가 4,600m 이상이어서 식생이라곤 누런 이끼류 한 종류뿐. 죄다 검은 돌로 뒤덮인 곳을 가로질러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부는 체트라 라를 넘는다. 한참 아래 있는 체트라 부 로지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넘어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런데 소현과 효범의 상태가 몹시 안 좋아졌다. 고산병은 누구도 가리지 않는다는데 이들에게 달라붙은 모양이다. 효범은 산소포화도가 50%대로 떨어졌고, 소현은 계속 속을 비워내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헬기를 타고 루클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리더는 용봉이다. 그는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탕낙에서 카레로 가는 길의 풍경.
그래도 원정은 계속됐다. 다음날 체트라 부 로지에서 고테 로지로 7.2km 이동했다. 고도를 700m 정도 낮춰서 몸을 이완시켜 주는 트레킹이다. 길은 오른쪽으로 깊은 비탈과 함께하지만 워낙 시야가 넓게 열려 있어서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중 아주 즐겁게 보았던 알프스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고개를 넘어서면서 메라 피크가 보이기 시작한다. 펨바가 손으로 가리키는데 워낙 주변 산세가 압도적이라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아이젠을 착용하고 얼음길로 내려서기도 하는 등 그렇게 고도를 낮추어 가다가 고도 3,500m 정도에 있는 로지에서 점심 겸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또다시 고도를 100여 m 더 낮춰 메라 콜라(강)에 닿았다. 그리고 강변길을 따라 2km 정도를 더 걸어 오후 4시 20분경 고테에 도착했다.
정상 등정 포기하는 대원도 생겨
메라 콜라를 따라 소레마을로 이동한 뒤 고소적응과 체력 비축을 위해 하루를 더 보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500m 정도 올라갔다 내려오는 산행을 훈련 삼아 했다. 그런데 미경이 짐짓 매우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펨바에게 메라 피크를 등정할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의 눈빛이 달라진 이유는 나중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들었다.
이제 메라 피크의 베이스캠프 격인 카레로 간다. 약 10km 거리를 걸으면서 고도를 1,000m 정도 높였다. 가는 길에 큰 바위 아래 있는 굴속에 불상을 모신 암자가 있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메라 피크 등정 성공을 경건하게 기도했다.
그런데 주위에 보이는 사람이라곤 우리뿐이다. 소위 말하는 네팔 여행 비수기라 그런 모양인데 왜 비수기인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날씨가 좋다. 우리 대원 6명과 셰르파팀 4명, 쿡팀 5명 그리고 포터 12명이 함께 움직이니 적막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카레에 도착하고 또 한 번 고소적응 훈련을 했다. 이제 해발고도 5,000m라 그런지 만만치 않다. 겨우 300m 올라갔는 데도 숨이 가빠졌다.
원래 다음날 정상 공격에 나설 예정이었는데 펨바는 하루 더 쉬자고 했다. 펨바가 얼마나 유능한 가이드인지는 이미 모두 알고 있었기에 이의는 없었다. 다만 지연되자 모두가 약간씩 불안감이 들었다. 특히 며칠 뒤 70세가 되는 경신이 그랬다. 국내 산행은 어디든 완주했던 그였지만 효범의 도중하차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메라피크 정상. 왼쪽부터 대원 용봉, 미경, 성예, 셰르파 파상, 펨바.
경신은 좀처럼 정상에 도전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면서 훈련을 모두 수행했다. 그리고 얼굴은 계속 어두웠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자 눈빛을 반짝이고 한결 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나이에 이미 5,000m급 산행을 했고, 고산증도, 탈진도 하지 않은 것에 만족한다"며 "굳이 정상에 도전하는 것보다 정상에 도전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결정인 것 같다"고 했다. 노년의 지혜다.
몸이 이상하다…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정상으로 간다. 경신과 나율은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정상까지 가는 것으로 정했다. 날씨는 무척 좋다. 40여 분 마른 길을 걷다가 드디어 커다란 빙벽 앞에 있는 크램폰 포인트에 섰다. 멀리서 봤을 땐 대단해 보이지 않던 빙벽이 가까이서 보니 마치 불가침 영역으로 보였다.
크램폰을 착용하고 한 손엔 피켈을 들고 펨바를 비롯한 셰르파 4명과 용봉, 나, 미경 그리고 성예가 하나의 줄(안자일렌)에 묶였다. 숨이 가쁘고 한 걸음 딛기도 힘들어 하는 우리와는 달리 펨바는 크레바스가 있는 곳 혹은 그 조짐이 보이는 곳을 용케 찾아내어 이리저리 피해 가면서 능숙하게 길을 인도했다. 너무 힘들어 분명 추운데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오후 3시경 우여곡절 끝에 하이캠프에 도착해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몸이 덜덜덜 떨리고 있다. 너무 이상했다. 지금까지 춥지도 않았고 춥다는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쿡팀이 전해 준 따뜻한 복숭아 통조림을 마셔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침낭 속으로 들어가 몸을 조금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기억이 끊겼다. 얼마나 지쳤는지 그 와중에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새벽 1시, 잠을 깨고 죽 한 그릇으로 다시 출발한다. 정상까지는 2.5km만 남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콧물이 뚝뚝 떨어지고 한껏 숨을 들이쉬어도 폐에는 겨우 한 줌의 공기만 담겼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으니 다리에 피로가 누적되어 걸음이 무거워지고 급기야는 뒤쪽에 있던 여성 팀이 우리를 추월해 지나갔다.
분발해서 열심히 발을 떼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질 않는다. 급기야 진행이 너무 늦는다고 판단했는지 두 셰르파들이 상의하더니 한 명은 용봉과 줄을 잇고, 또 다른 셰르파는 나와 줄을 이어 각기 진행했다. 순식간에 용봉의 불빛은 저 높이 올라갔고, 여성 팀의 불빛은 까마득하다.
갈 수 있는 사람은 밀어주고, 안 될 사람은 되돌린다고 하던데 괜히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기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되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되돌아갈 때 가더라도 오를 수 있는 만큼은 올라갔다가 내려가자는 결심을 세우고 마치 구도자가 삼보일배 하듯이 스무 발짝을 걷고 멈추고, 또 스무 발짝을 걷고는 쉬고 하면서 조금씩 올라갔다.
크램폰 포인트에서 본 빙벽. 멀리 쿡팀의 모습이 개미처럼 보인다.
어느새 동쪽 하늘이 붉어지더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펨바는 해가 뜨는 시간 정도에 정상에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정상은 아직도 멀리 있어 볼 수 없다. 불쑥 오기가 생겼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닿았는지 어느새 메라 중봉이 보이는 곳까지 올라섰다.
그래도 정상은 요원해 보여 의기소침했다. 그러자 "2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펨바의 동생 취링이 열심히 응원해 준다. 걷고 또 걸으니 이미 정상을 찍고 중봉 아래에 내려선 대원들이다.
그들 모두 열성적으로 격려하고 응원했지만 고백컨대 그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들과 합류해서 내려가고픈 강력한 유혹이 온 머리에 가득했다. 그래도 그 유혹을 견뎌내고 다시 정상을 향해 걸었다. 에너지가 거의 소모된 상태라 말 그대로 삼보일배, 세 걸음 걷고 쉬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마침내 정상이다. 서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가슴이 벅차지도, 감동스럽지도 않았다.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하산도 힘들었다. 하이캠프로 돌아와서 텐트 속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카레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서 종합감기약 두 알을 한 입에 털어 넣고 쓰러지듯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메라 피크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나이 때문에 실패를 걱정했는데 정상을 등정했다. 높은 정상을 정복했다는 그런 성취감보다는 온 에너지를 소진하면서까지 산을 오르고 내려온 그 과정이 더욱 소중한 것 같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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