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난희는 1984년 여성 최초로 태백산맥을 겨울에 단독 일시종주했으며, 1986년 여성 세계 최초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다. 1989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74일간의 태백산맥 단독 일시 종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을 펴내 등산인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22년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알린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알베르 마운틴 상을 수상했다.



불일폭포 입구의 쌍계사 대나무숲.


친구가 찾아왔다. 모처럼 특식을 먹듯이 삼신봉(1,355m)을 가기로 했다. 매일 은행 저금리 가는 불일폭포 코스가 주식이라면, 가끔 간식 먹듯 다른 곳을 가거나 긴 산행을 한다. 갈수록 특식 먹을 일이 줄어들고 있었는데 친구 덕분에 마음먹은 것이다.
삼신봉은 지리산 주능선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보는 풍광이 빼어나고 기운 또한 좋아서 지리산에서도 중요한 봉우리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무엇보다 차를 타지 않고도 산행할 수 있어서 예 삼성카드 통신비 전에는 자주 갔다. 세월이 흐르며 행동반경이 점점 줄어들었다. 특별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불일폭포에 다녀오는 것만으로 안주하다 보니 최근에는 가지 않게 된 곳이 많다.
시작은 평소와 같다. 불일폭포까지는 같은 길로 올라간다. 동네를 벗어나 쌍계사를 지나 불일폭포를 만나고 난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산길은 그동안 사람들의 왕래가 없 캐피탈금리상담 어서 낙엽이 가득 덮고 있었다. 지리산 주능선도 아니고, 경사도 급할 뿐만 아니라, 길도 썩 좋지 않아서 등산객들에게 인기 없는 코스로 알려져서일 것이다.
낙엽이 쌓여 있는 길은 그 아래 무엇이 숨어 있는지 몰라 조심스럽다. 바위나 나무뿌리는 물론 얼음이라도 깔려 있다면 위험천만이지만 오르막이라 그래도 좀 낫다. 조금 오르자 며칠 전에 내 러시앤캐시10등급 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오를수록 눈은 많아져서 겨울 산행 기분이 들어 좋았다.



눈길을 걷는 나.


생각만 해도 그리운 능선, 지리산
사람이 지나가지는 않지만 우리 앞을 지나간 여러 발자국들 대구광역시지방자치단체 이 있었다.
아주 작은 새의 발자국을 비롯해서 큰 새의 발자국, 토끼, 노루의 발자국도 있고 멧돼지는 좀 부산한 움직임으로 자국을 남겼다. 고양이과의 크고 작은 발자국을 비롯해서 알 수 없는 제법 큼직한 발자국도 남아 있었다.
며칠 시간이 지나서겠지만 내가 모르는 여러 자국들이 길 위에, 바위 위에 찍혀 있었다. 이 산에는 내가 미처 몰라서 그렇지 무수히 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인적이 없으니 산 짐승들에게는 살아가는 조건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발자국으로 남겨진 것들 말고도 더 많은 생명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그 안에 침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와,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두려움. 그리고 왠지 모를 반가움이 교차했다. 매일 오갔던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물론 눈이 쌓여서 더 잘 보였겠으나 세상을 한참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도 좋았고 눈의 감촉도 좋았다.



빙벽이 된 불일폭포.


여러 상황이 급경사의 오름도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상불재에 올라선 것이다. 이제부터는 능선길이다. 눈길에 사람 발자국이 생기며 더는 짐승 발자국은 없었다. 능선에는 눈이 제법 쌓였지만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주능선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망이 트인 곳에서는 노고단부터 천왕봉까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확 다가왔다. 눈을 한 가득 이고 있는 그 능선으로 발길은 달려간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언제 봐도, 생각만 해도 그리운 능선이다. 방향을 돌리면 산 아래로는 도인촌과 묵계호가 내려다보이고 눈을 멀리로 들면 남해바다가 아스라하다. 그뿐인가? 산과 산을 이어 가는 끝없는 유장한 능선들과 계곡들, 언제 봐도 감탄할 만한 풍광에 넋을 잃는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낙엽이 쌓인 산길.


오른쪽 능선을 조금 벗어난 곳에 독바위가 우뚝하다. 이 바위는 조금 후에 나타날 쇠통바위와 더불어 이 능선의 상징이다. 독바위는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도인촌 초입에서 올려다보면 부처님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모마리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능선의 기운을 모아 아랫마을이나 삼성궁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디서 올려다봐도 예사로운 바위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독바위에 서면 기운이 세차게 느껴지고 전망 또한 좋아서 하루 정도 머물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통과한다. 길옆에 금줄이 처져 있어서 출입을 막고 있는 까닭이다. 바위와 신갈나무 숲, 조릿대 숲으로 길은 이어진다. 이 능선의 바위들은 위풍당당하고 잘생겼다. 그 바위 사이로 길은 잘 나있는 편이다. 예전에 로프가 있던 곳은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빽빽하게 숲을 이룬 나무와 낙옆.


이제 쇠통바위를 만날 차례다. 마치 자물통처럼 생겨서 쇠통바위라 불린다. 바위 사이가 열쇠구멍처럼 뚫려 있는 커다란 바위로,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아랫동네 학동계곡에 있는 열쇠처럼 생긴 바위로 이 쇠통바위를 열면 천지개벽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열쇠바위와 쇠통바위가 만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 믿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삼신봉으로 향한다. 삼신봉은 세 봉우리로 외삼신·내삼신 그리고 본삼신이 있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내삼신으로 해발 1,355m나 된다. 세 봉우리 모두 전망은 비슷하다. 사방이 조망되고 빼어나다. 지리산 주능선의 모든 봉우리들이 반갑다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그중 눈을 하얗게 인 촛대봉과 천왕봉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눈 위에 찍힌 짐승 발자국.


북측이 주장하는 백두대간 끝, 구재봉
지리산에서 '신'자가 들어가는 지명의 봉우리는 영신봉과 삼신봉이다. 그 봉우리들은 유난히 기운이 좋아서 예전부터 기도터로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국립공원공단에서 모두 철거했지만 기氣 빨 좋은 기도터로 알고 있는 전국의 수행자나 무당들이 상주하며 기도를 하거나 움막을 쳐놓고 아예 살기도 했다.
영신봉 주변의 영신대는 입산통제 구역이라 들어갈 수 없지만 삼신봉은 제단이 있어 지금도 때에 따라 기도와 치성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영신봉에서 시작된 유장한 남부능선은 낙남정맥이라는 이름을 겹쳐 삼신봉에 이른다.



쇠통바위.


삼신봉에서 한 갈래는 외삼신을 거쳐 낙남정맥으로 내달리고, 한 갈래는 내삼신을 거쳐 상불재를 지나 하동 악양 분기점에서 다시 갈래를 나눠 하나는 형제봉으로 해서 고소성을 지나 섬진강에 빠지고, 다른 하나는 거사봉을 지나 회남재를 찍고 시루봉을 올랐다가 구재봉에 이르러 또한 섬진강으로 뛰어든다.
악양 구재봉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북한에서 발표된 백두대간 산줄기가 이곳 구재봉에서 끝이 난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비롯한 여러 부분들을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겨울 산의 칼바람과 시원한 조망을 뒤로 하고 이제는 하산이다. 비교적 길이 쉽고 짧은 도인촌으로 하산코스를 잡았다. 아래로 내려오며 쌓인 눈이 녹아서 질척이는 길이 계속되고, 계곡의 물소리는 봄의 소리를 담고 있었다. 아직은 춥지만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계곡 물소리가 전해주는 것이다.



삼신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처음 서울 생활을 접고 자리를 잡았던 곳이 이곳 도인촌이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간 후로 산행 때 말고는 잘 오지 않았던 곳인데 반가운 사람을 만나 회포도 풀고 넉넉한 대접까지 받고 돌아오는 길은 왠지 충만한 기분이다.
이날 산에서 만난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고마웠다. 칼바람, 눈, 짐승들의 발자국, 지리산 주능선의 아름다운 풍광, 남부능선의 꿈틀거림, 먼눈으로 보는 바다, 친구와의 동행, 오랜 인연과의 만남,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앞으로 주식만 먹지 말고 가끔 간식도 먹고 특식도 찾아 먹어야겠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