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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2,3 계엄에서 여러 말들이 나왔지만, 눈길을 끈 단어 둘을 꼽으라면 '수거'(收去)와 처단(處斷)이다. 먼저 '수거'(收去)를 살펴보자. 전 정보사령관 노상원은 자신의 수첩에다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 현직 판사를 포함한 법조인 등을 '수거' 한국저축은행bis비율 대상으로 적어 놓았다. 깡통이나 신문지 따위를 '분리수거'하듯이 대한민국의 주요 인물들을 붙잡아 처리하려 했다니, 할리우드에서 넘쳐나는 B급 코미디 영화에서나 볼 듯한 얘기다.
수거, 처단, 소탕, 최종해결
전 정보사령관은 예전에는 '정보 분야 공작의 전문가'로 알려졌다. 정보사령관에 이어 육군정보학교장으로 있던 201 국민주택기금 전세자금대출 연장 8년, 다른 날도 아닌 10월1일 국군의 날 저녁에 여군 교육생을 성추행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런 일로 불명예 제대를 한 뒤엔 남의 사주와 손금을 봐주는 '역술인'으로 지냈다. 이런 변신은 보통사람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듯하다.
B급 영화 드라마 같은 전력을 지닌 12.3 내란 기획자의 수첩엔 '수거'에 더해 '사살'이란 환승론대출 글자도 들어 있다고 한다. 마음에 안 드는 인물들을 붙잡아 가두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그의 '수거'와 '사살'은 1930년대 히틀러에 충성을 바쳤던 돌격대(SA) 극렬 대원들의 정치 테러를 떠올린다. 악명 높았던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서나 가능했던 야만적 잔혹사가 되풀이되는 것일까.
'수거'와 더불어 눈길을 모은 단어가 '처단'이다 금화저축은행 . 계엄 선포와 더불어 나온 포고령 1호에는 '처단'이란 섬뜩한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온다. △의료 현장을 벗어난 의료인이 복귀하지 않을 경우 '처단'하고, △포고령을 어긴 자는 계엄법 제14조에 따라 '처단'한다고 돼 있다. '처벌'이라면 몰라도 '처단'이라니, 용어 선택에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지난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끝에 민주화를 이 신한은행 예금담보대출 뤄낸 집단기억을 지닌 21세기 한국시민들의 눈길로 보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섬뜩한 용어다.
포고령 1호의 '처단'이나,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 적힌 '수거'는 20세기 전반기 독일에서 대량학살을 저질렀던 골수 나치들의 수사(修辭)를 떠올린다. 12.3 내란 때 윤석열 패거리의 수사는 나치의 수사에 견주어 훨씬 거칠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나치는 수백만의 생목숨을 앗아간 전쟁범죄를 저지르면서도 '학살'이란 단어를 직설적으로 쓰지 않았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이니 '처리' 따위의 용어로 그들의 조직적인 집단학살을 에둘러 나타냈다.
나치는 '처리'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소탕'이란 단어를 쓰긴 했다. 1940년대 동유럽에서 마구잡이 학살을 저질렀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기동학살부대) 요원들은 '소탕'(Säuberung)이란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전선 후방에서 독일군을 기습 공격하는 파르티잔을 없앤다며 출동하면서 “시골을 소탕하러 나간다”고 했다. 말이 '소탕'이지 그것은 곧 파르티잔을 핑계 삼아 유대인을 포함한 현지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것을 뜻했다.



▲ 1942년 베를린에 모인 ‘히틀러의 장군들’. 빌헬름 카이텔 국방군 최고사령관(맨왼쪽),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사령관(가운데), 에르하르트 밀히 제5공군함대 사령관. 카이텔은 교수형으로, 힘러는 독극물을 삼키고 죽었고, 밀히는 무기형을 받았으나 그 뒤 풀려났다. ⓒ위키미디어



독일군 최고사령부, '범죄 조직' 아닌가

미국을 비롯한 전승국들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준비하면서 나치당 최고위원회(Vorstand), 히틀러 내각(Reichsregierung), 비밀경찰조직인 게슈타포(Gestapo), 제국보안대(SD), 친위대(SS), 돌격대(SA) 등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에서 '히틀러의 도부수(刀斧手)' 역할을 맡았던 부서를 '범죄 조직'으로 처벌하려 했다.
전승국이 꼽은 '범죄 조직'의 목록 속에는 독일국방군 참모부와 최고사령부(OKW)도 들어가 있었다. 이에 따라 독일국방군 최고위급 지휘관 130명의 전쟁범죄 기록을 담은 기소장도 마련됐다. 이들 130명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1년 반 전인 1938년 2월부터 1945년 5월 전쟁이 끝나는 시점 사이에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해군 최고사령부, 공군 최고사령부, 야전군 사령부에서 복무한 이른바 '히틀러의 장군'들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방침이 바뀌었다. 독일국방군의 전쟁범죄를 비판적으로 다룬 볼프람 베테(프라이부르크대, 전쟁사)의 글을 보자.
[재판 준비과정에서 참모부와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범죄 집단'으로 선고하는 것은 정당화하기도 힘들고 실행되기도 어렵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군사 법정은 참모부나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국제 전범재판 규정 제9조에 있는 (범죄) '조직'이나 '집단'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따라서 군사 법정은 오직 개인에 대한 법률적 판단만 하게 됐다](볼프람 베테, <독일국방군>, 미지북스, 2011, 267쪽).
볼프람 베테는 참모부와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범죄 조직'으로 낙인찍히지 않았다고 해서 '무죄 선언'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의 수석재판관 제프리 로런스의 판결문을 보더라도 독일국방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심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지적이 담겨 있다. 판결문의 주요 내용을 옮겨본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남성, 여성, 아동이 당한 고통과 불행에 대하여 많은 책임이 있다. 그들은 명예를 존중하는 군의 불명예가 됐다. 그들의 군사적 기여가 없었다면,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의 침략적 야망은 단지 공상에 그쳤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국제전범재판 규정에 따르는 '집단'에 속하지 않지만, 냉혹한 계급 논리에 따르는 카스트 조직임에는 틀림없다](볼프람 베테, 268쪽).
로런스 판사는 이 판결문에서 독일국방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적극적으로 범죄에 가담했거나, '전례 없는 규모의 충격적인 범죄가 저질러지는 현장을 조용히 보면서 묵인'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개인적 범죄의 증거가 드러나면, '그 범죄의 책임이 있는 자들이 처벌을 피하지 못하도록' 재판에 붙여져야 한다고 못 박았다.
(마찬가지로, 12.3 내란 음모의 진상이 드러나면 가담자들, '윤석열의 장군'들과 민간인 측근들을 피고석에 세워야 마땅하다. 이번에 느슨하게 넘어갔다간, 또 다른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많은 시민들은 제2, 제3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도 법의 힘을 빌려 역사의 교훈을 남기길 바라고 있다).
12개 후속재판, 군 지휘관 재판은 6개
독일 전범재판은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주요 전범자들을 다룬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이것 말고도 다른 여러 재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미국이 독자적으로 열었던 12개의 후속재판(Subsequent Nuremberg Trials)을 빼놓을 수 없다. 재판의 성격별로 나누어 보면,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다룬 재판이 6개, △의사․법률가․공무원 등 나치의 전쟁범죄에 관련된 전문 직업인들 재판이 3개, △나치 기업인들을 다룬 재판이 3개다.
오로지 미국인 판사와 검사로 짜여진 뉘른베르크의 12개 후속재판 피고석에 선 이들 185명 가운데 142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는 25명이고(11명은 나중에 무기징역형으로 감형), 무기징역형은 20명, 유기징역은 97명이다(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재판이 중단된 피고 4명, 재판 도중 자살한 피고 4명, 무혐의 석방자 35명). 교수형으로 죽은 피고들 말고 나머지 전범들은 짧은 감옥살이 끝에 거의 대부분이 1950년대 중반 무렵까지 감형과 사면으로 풀려났다. 그 배경엔 (글 끝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동서냉전 구도 아래서 서독을 재무장시키려는 미국의 대외정책 덕이었다.
동서 냉전의 국제정치적 요인 덕에 전범자들이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패전국 일본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고 동아시아의 반공 동맹국으로 만들겠다는 워싱턴의 결정에 따라 일왕 히로히토(裕仁, 1901-1989)는 아예 기소조차 안 됐다. 주요 전범들도 덩달아 단죄를 피했다. 감옥에 갇힌 채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17명의 전범들은 1948년 12월에 감옥에서 걸어 나왔고, 전범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던 전범들도 1950년대에 감형과 사면으로 모두 풀려났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520-521쪽 참조).
"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12개의 후속재판 가운데 독일국방부 고위 장교들을 법정에 세운 재판은 모두 6개다. △에르하르트 밀히 독일 공군 원수의 전쟁범죄를 다룬 '밀히 재판'(후속재판 2), △친위대(SS) 상급집단지도자 오스발트 포흘을 비롯한 친위대 장교 18인을 단죄한 '포흘 재판'(후속재판 4) △발칸반도를 점령한 육군 남동방면군 지휘관들의 전쟁범죄를 다룬 '인질 재판'(후속재판 7) △나치의 인종 차별 및 강제이주 계획에 참여했던 친위대원들을 처벌한 RuSHA 재판(후속재판 8) △악명 높은 나치 기동학살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지휘관들을 단죄한 '특수작전집단 재판'(후속재판 9),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 소속 장성 14인을 단죄한 재판(후속재판 12) 등이다.
독일국방군 고위 장교들을 단죄한 재판 가운데 가장 먼저 열린 것은 에르하르트 밀히(독일 제5함대사령관, 공군 원수)의 전쟁범죄를 다룬 '밀히 재판'(후속 재판 2)이다. 기소장에 따르면, 밀히에겐 크고 작은 여러 전쟁범죄를 고의적으로 저지른 혐의가 따랐다. 수감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의학실험(이를테면 독일 비행사들이 닥칠 위기상황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고압이나 무산소 상태에 인간이 얼마나 견디는가의 실험)을 하는 행위에 관련된 혐의, 전쟁포로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한 혐의 등이었다.
1946년 11월14일 기소돼 12월20일에 열린 재판에서 밀히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며 목청을 높였다. 뒤늦게나마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는 모습은 없었다. 그에겐 무기징역형이 선고됐으나 1951년 15년으로 감형됐다. 하지만 동서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독을 동맹국으로 끌어안으려는 분위기를 타고 1954년 풀려났다.
'밀히 재판'에 이어 독일군의 전쟁범죄 처벌과 관련된 후속재판 가운데 두 번째로 열린 '포흘 재판'(후속재판 4)은 친위대(SS) 상급집단지도자 오스발트 포흘을 비롯해 친위대 장교 18인이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아우슈비츠처럼 대향학살이 벌어진 수용소)의 전쟁범죄와 관련해 죄를 물었던 재판이다. 친위대 경제행정본부 소속인 이들 장교들은 친위대의 행정 업무를 보면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과 무장친위대(Waffen-SS)의 병참과 보급을 도와주었고, 결과적으로 대량학살의 공범자가 됐다.
1947년 11월3일에 내려진 판결은 사형 4명, 무기징역 3명, 20년 징역형 2명, 10년 징역형 6명(3명은 무혐의)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교수형이 이뤄진 것은 오스발트 포흘(친위대 경제행정본부장)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잇단 감형 조치로 모두 풀려났다.
파르티잔 없는 파르티잔 소탕 작전
발칸반도를 점령한 육군 남동방면군 소속 12명 장군들의 전쟁범죄를 다룬 것이 '인질 재판'(후속재판 7)이다. 독일군은 그리스와 옛 유고연방 지역에서 반독 유격대 파르티잔의 기습 공격에 골머리를 앓았다. 파르티잔의 투쟁 의욕을 꺾으려고 독일군은 일반 주민들을 '인질'로 삼았다. 독일군 병사들이 파르티잔에게 죽고 다치면 수십 배의 '인질' 처형으로 보복을 하곤 했다.
전쟁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독일군이 승리를 거듭하며 점령지를 넓히던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파르티잔은 독일군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1941년 7월3일 스탈린은 소련 인민들에게 “후방에서 독일군에 맞선 파르티잔 전투를 벌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그런 호소는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공방전이 끝날 때까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프람 베테의 글을 보자.
[1941년에서 1942년 사이, 즉 점령 초기 국면에서 파르티잔 전투라는 미명 아래 실제로 일어난 일은 독일국방군 사령관들의 보고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보고서에 다르면, 독일군 1명이 사망하면 평균적으로 러시아 '파르티잔' 100명 정도가 사망했다. 역사가 한네스 헤어는 독일군이 자랑하는 이 결과는 '파르티잔 없는 파르티잔 소탕 전투의 기이한 상황'에 대한 증거라고 풀이한다](볼프람 베테, 173쪽).
독일군은 존재감이 거의 없는 파르티잔을 소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유대인을 비롯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6개월 동안 이어졌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항복(1943년 2월2일)한 뒤 상황이 달라졌다. 실제로 파르티잔은 독일군에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그러자 독일군의 대응은 무자비했다. 이를테면 1943년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에서 반란진압 작전을 펴던 독일군 사령관은 이런 지시사항을 내려 보냈다. “부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모든 조치는 정당하다. 지나치게 가혹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 후반기에 독일이 수세 국면에 접어들면서, 독일군의 가혹행위가 더 심해졌다. 1944년 7월30일 히틀러 최고사령부는 '테러 분자와 사보타주 분자에 대항하는 투쟁'에 대한 추가 지령문을 내려 보내, 필요할 경우 민간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 '배려하지 않는다'란 곧 죽음을 뜻했다. 관련 글을 보자.
[연구에 따르면, 모든 부대가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지만 장교들은 민간인 살해를 피하지 말라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공군부사령관 후고 슈페를레 원수는 지휘관들에게 '유약하거나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면 처벌할 테지만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는 용납될 것이라 말했다. 군인들은 도덕적 가책을 느끼는 자는 '독일 국민과 전선의 군인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셈'이라는 말을 들었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최후의 제국주의전쟁 1931-1945>, 책과함께, 1245쪽).
'인질 재판'에 기소된 육군 남동방면군 장군 11명 가운데 사형 판결을 받은 이는 하나도 없다. 빌헬름 리스트(육군 야전원수, 육군 제12군 사령관)와 육군 공병대장을 지내다가 리스트의 후임으로 갔던 발터 쿤체, 이렇게 2명만 종신형을 받았다. 유고슬라비아 방면의 제2기갑군 지휘관 로타르 렌둘릭(육군 대장)과 그리스 군정청장 빌헬름 슈파이델(육군 소장)에게 각각 징역 20년, 나머지 4명의 장군에게 징역 7~15년 형이 떨어졌다(1명은 재판 중 자살, 무죄 2명). 하지만 이들도 잇단 감형으로 풀려났다.



▲ 발칸반도를 점령한 뒤 파르티잔 소탕 작전을 펴며 민가에 불을 지르는 독일군 병사들. ⓒ위키미디어



만슈타인, "유대인들이 차던 시계, 나눠달라"

지난 글에서 A,B,C,D 4개의 이동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 유대인 130만을 포함한 200만 명을 집단학살했다는 사실을 짚어봤다(연재 94). 이 무자비한 부대 지휘관들을 단죄한 것이 '특수작전집단 재판'(후속재판 9)이다. 1947년 9월일부터 1948년 4월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24명의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14명에게 교수형, 3명 무기징역 3명, 2명 20년형, 2명 10년형(자살 1명)이 내려졌다.
사형 판결을 받은 14명 가운데 실제 교수형 집행이 이뤄진 것은 아인자츠그루펜 D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를 비롯한 4명에 그쳤다. 나머지 10명은 감형 조치로 목숨을 건졌을 뿐더러 유기징역형을 받은 다른 독일 전범자들과 함께 잇단 감형과 사면으로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1958년까지 이들은 모두 풀려났다. 무려 200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그들의 전쟁범죄에 견주어 단죄 결과는 너무 솜방망이였다.
'유대-볼셰비즘 체제의 절멸'을 강조하면서 “유대인에게 혹독한 죗값을 받아내야 한다”고 지시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육군원수)은 그 자신의 죄를 묻는 법정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고 부인했었다(연재 96, 97 참조). 하지만 '특수작전집단 재판' 과정에서 거짓말로 드러났다. 심지어 만슈타인은 학살부대장에게 “유대인들로부터 압수한 시계들을 국방군에 나눠달라”고 했다. 이와 관련, 류한수(상명대, 유럽현대사)의 글을 보자.
“만슈타인이 언급한 '유대-볼셰비즘 체제의 절멸'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1942년 제11군의 점령지역인 크림 반도에서 친위대의 오토 올렌도르프 소장이 지휘하는 아인자츠그루펜 D부대가 대량학살을 저질렀고,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9만 명을 넘었다. 만슈타인은 올렌도르프를 통해 학살 현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따라서 학살을 전혀 몰랐다는 만슈타인의 진술은 사실과 어긋난다. 만슈타인은 부하인 오토 뵐레 참모장을 시켜 학살된 유대인들에게서 약탈한 손목시계를 육군에 나눠달라고 올렌도르프에게 지시했다. 이 사실은 만슈타인이 유대인 학살을 인지했고 그의 예하 병력이 학살에 관여했음을 뜻한다](류한수,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산파 리델 하트>, '대구사학' 130호, 2018).
"아이들이 자라나면 위험해 죽였다"
아인자츠그루펜 D부대의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는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박사학위를 지닌 지식인이었다. 그는 히스 검사(미국인)가 유대인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들 역시 그들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살해되었다”라고 했다. 굳이 아이들마저 집단학살한 까닭을 묻자, 그는 “그 질문에는 아주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 학살을 피해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던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1926-2007)의 책에서 올렌도르프의 법정 발언을 들어보자.
"새로운 질서가 원한 것이 단순한 안보가 아니라 영원한 안보라면, 아이들은 성장할 것이며, 살해된 부모들의 아이들도 성장할 것이니, 그들은 그들 부모 못지않게 위험한 존재지요."(라울 힐베르크,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511쪽).
올렌도르프의 그 다음 발언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미국의 무차별 공습으로 많은 독일 아이들이 죽었다면서, 미국도 전쟁범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다른 나라(미국과 영국)의 안보 때문에 공습으로 희생된 많은 (독일) 아이들을 압니다”(라울 힐베르크, 1511쪽). 올렌도르프의 시각에선, 그가 피고석에 선 이유는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고, 공습으로 많은 민간인들을 죽인 같은 전범국가인 미국이 세운 법정은 '승자의 재판정'이었다.
"나를 위한 기념비 세워진다"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서 전쟁범죄로 기소된 피고인들 가운데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뉘른베르크 말고 다른 곳에서 벌어졌던 전범재판에서도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독일 육군 남부방면군 사령관 알레브트 케셀링도 그러했다. 영국군이 194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설치한 군사법정에서 케셀링은 그가 지휘했던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이 민간인 학살과 약탈 등 숱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궤변을 늘어놓았다.
"잔혹한 전쟁 속에서도 독일 장병들의 행동은 인도적․문화적 가치를 지키고 경제적 기준을 따랐다. 이것은 이 정도 규모의 큰 전쟁에서는 보기 드문 행동이다"(볼프람 베테, 281쪽).
케셀링은 이탈리아인들이 그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워주리라는 엉뚱한 기대감마저 내비쳤다(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달아났던 고부군수 조병갑이 훗날 그 자신을 위한 '송덕비'가 세워지길 바란 것과 마찬가지다). 케셀링의 법정 발언을 듣던 사람들은 그의 뻔뻔한 발언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을 듯하다(케셀링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형으로, 그리고 다시 21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목에 종양이 생겨 1952년 감옥에서 풀려났으나, 1960년에야 죽었다. 풀려난 뒤 극우 단체에 가입하고 인터뷰에서 무죄를 거듭 주장했다).
케셀링의 후임으로 남부방면군사령관을 지낸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쉘 장군의 법정 발언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면서 “독일군은 처음부터 옛 시절처럼 신사적으로 싸웠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정하게 진행됐다”고 우겼다. 실상은 그의 주장과는 달랐다. 4만 6,000명의 이탈리아인이 강제수용소에 갇혔고, 3만 7,000명이 강제 이주를 강요당했고, 유대인 7,400명을 포함한 2만 3,400명이 죽었다(볼프람 베테, 281쪽).
다시 군에 복귀하거나 연금 챙겨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다룬 재판은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지도급 전범들을 다룬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945년 11월20일-1946년 10월1일)과 뒤이은 여러 후속재판, 그리고 전승국들의 점령지역과 소련에서의 독자적인 전범재판 등으로 1949년 봄까지 이어졌다. 어떤 재판은 빠르게 마무리되었지만, 시일을 길게 끈 재판도 여럿 있었다. 피해자 또는 생존자의 증언을 듣거나,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측과 검찰 사이의 공방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전승국들에 견주어, 소련의 나치 전범 처벌은 빠르고 단호했다. 독일의 침공으로 소련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에 복수심이나 증오심이 컸다. 수천 명의 무장친위대 장교와 나치당 간부가 처형됐으며, 포로가 된 뒤 독일군을 도왔던 수만 명의 '변절 러시아인'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많은 경우 정식 재판 절차를 거쳐 죗값을 치르기 보다는 약식 재판을 거쳐 빠르게 처형됐다.
문제는 소련을 빼고는 제대로 전범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소련과 함께 국제질서를 양분하게 된 미국은 서구 자본주의를 지키는 옹벽으로 서독을 재건하려 했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서독의 재무장이었다. 1949년 5월에 출범한 서독 정부도 그것을 바랐다. 그런 분위기 아래 1952년 2월 미국․영국․서독 3개국은 삼각 사면위원회를 구성하여, 투옥중인 전범들의 판결을 재검토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전범자들이 감옥에서 보낸 기간은 형량에 견주어 매우 짧았다. (앞에서 살펴본 알레브트 케셀링처럼) 재판 도중에 피고인의 건강이 나빠져 풀려나거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처럼) 잇단 감형과 사면을 받아 1950년대 중반까진 거의 모두 풀려났다(만슈타인은 1949년 12월에 1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달 뒤에 12년으로 감형되었고, 1952년에 석방됐다). 1955년 미국군과 영국군 감옥에 갇혀 있던 독일 전범자들의 수는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라울 힐베르크, 1514쪽).
[1955년에 냉전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독일은 동서양의 주요 전쟁터가 됐다. 영국과 미국은 많은 전직 독일 장군들과 장교들을 복권시켰고 이들은 서독군의 핵심이 됐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일부 독일군 참전 용사들은 동독군에 합류했다. 히틀러의 장군들은 새주인을 찾았다.] (팀 리플리, <독일국방군>, 플래닛미디어, 2023, 467쪽)
1951~1953년 사이에 서독 연방의회는 나치 독일에서 일했던 공무원들과 군인들에게 고용의 권리와 연금을 보장했다. 게슈타포와 무장친위대로 전직되었던 공무원들과 군인들도 같은 보장을 받았다. 풀려난 '히틀러의 장군들'도 마찬가지로 복권돼 연금을 챙기게 됐다. 이를 두고 “탈나치화(Entnazifizierung)는 물 건너갔고, 재나치화(Renazifizierung)가 시작되는 것이냐”는 말들이 나돌았다.
'히틀러의 장군들'은 저마다 회고록을 펴내며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깨끗한 독일군 신화'를 퍼뜨렸다. 이런 마법 같은 일들은 동서 냉전의 바람을 타고 일어났다. 다음 주 글에선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으로 다뤄진 나치 의사재판, 나치 기업인재판, 나치 법률가재판을 살펴보며 문제점을 짚어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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