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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석유를 수입하는 재미를 톡톡히 보는 국가다. 한국은 2023년 866억원 규모의 원유를 수입했다. 이 원유로 휘발유, 경유 등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는 석유제품을 만들어 534억달러를 수출했다. 또 원유에서 추출해 가공한 석유화학 제품을 521억달러어치 수출했다. 국내에서 사용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189억달러의 이익을 봤다.
원유를 정제하면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 무지개론 과 함께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가 되는 납사(나프타)가 나온다. 납사를 가공하면 에틸렌, 프로필렌 등 석유화학의 기본이 되는 제품이 나오고, 여기서 파생된 다양한 화학제품이 화학산업을 이룬다. 한국은 2021년 기준 연간 1270만t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세계 4위 국가다. 한국보다 에틸렌 생산 능력이 큰 나라는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밖에 없다. 기름 한 재테크 초보자가 꼭 알아야 할 57가지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기름을 원료로 하는 석유화학산업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내 제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반도체, 자동차, 기계, 철강에 이어 5위를 차지한다.
롯데타워까지 담보로
오랫동안 묵묵히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화학산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얼마 전 롯데케미칼은 롯데그룹의 우리은행 대출이율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롯데월드타워(이하 롯데타워)를 은행에 담보로 내놨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의 평생 숙원 사업이었던 그 롯데타워다. 롯데그룹이 롯데타워를 담보로 내놓은 이유는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돈을 못 갚으면 롯데타워를 내놓을 테니 믿어달라는 외침이다.
롯데케미칼은 2조원 규모 회사채에 대한 기한이익상실(EO 든든학자금 대출 D) 사유가 발생했다고 선언했다. 기업은 돈을 빌릴 때 몇 가지 약속을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만기 전에 돈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 통상 만기까지 빌린 돈을 쓸 수 있을 것을 전제로 자금 운용을 하기 때문에 갑자기 돈을 갚으라고 하면 부도가 날 수 있다.
롯데케미칼은 ‘버는 돈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빌리지 기준금리코픽스 않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으로는 이자비용 대비 상각전이익(EBITDA)을 3년 평균 5배 이상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버는 돈이 낼 이자에 비해 5배는 많아야 한다는 뜻이다. 한순간에 5배 이하로 떨어질 거라고, 3년 동안 꾸준히 상황이 안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 2021년 2조3천억원에 달하던 롯데케미칼의 이익은 2024년 들어 3분기까지 6600억원 적자로 줄었다. 부채총계는 2020년 기준 2조6천억원에서 2023년 말 기준 6조1036억원으로 2배 넘게 늘었다. 이자 대비 이익은 2021년 27배였지만 2022년 1.2배, 2023년 2.2배로 낮아졌다. 3년 평균 5배를 하회하면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된 것이다.
롯데케미칼은 석유화학 업황이 침체해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4조원 이상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빚 갚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롯데그룹도 “부동산 자산이 56조원, 가용예금은 15조4천억원으로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금융시장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나 부동산 많은 거 알지? 나 못 믿어?’ 같은 말로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다보니 돈을 갚겠다는 확실한 의지, ‘롯데타워’를 담보로 내놓게 된 것이다.
롯데케미칼의 위기는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단면일 뿐이다.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공장을 팔고 멈추는 것 외에 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워낙 탄탄한 산업이라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겠지만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한국보다 원가 경쟁력이 높은 중국과 중동이 하루가 다르게 석유화학 생산 능력을 키우고 있다.
화학제품은 우리 생활 어디에서나 사용된다. 각종 플라스틱 제품은 물론 고무, 타이어, 건축용 단열재, 건자재, 전선, 옷을 만드는 실, 색을 칠하는 페인트도 화학제품이다. 워낙 많은 산업 영역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화학산업의 업황은 경제 상황과 일치한다. 경기가 좋으면 많이 팔리고, 경기가 나쁘면 덜 팔린다. 한국 화학산업은 한국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함께 성장했고, 이웃 국가인 중국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크게 성장했다.
석유화학 공장을 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정하고 투자하면 못할 일도 아니다. 중국은 화학산업 자립화를 위해 수년 동안 대규모 투자를 했고, 이제 다른 나라에서 굳이 수입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중국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2019년 2711만t에서 2023년 5174만t으로 4년 만에 2배로 늘었다. 중국의 연간 에틸렌 소비량은 5800만t가량 된다. 자급률 100%를 목전에 두고 있다. 2017년 한국 화학제품 수출의 46%는 중국을 향했다. 2023년에는 36%로 줄었다. 앞으로 더 줄었으면 줄었지,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중동의 COTC 공법
우리가 중국의 과잉생산을 주로 언급하지만, 중동 상황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화학제품 생산량만큼 소비량도 많다. 중동은 소비량이 별로 없는데 생산량은 급증하고 있다. 산유국인 중동 국가들은 탈탄소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대대적인 석유화학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자동차가 휘발유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가 오면 원유가 국가 산업의 전부인 나라들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원유가 아닌 화학제품을 팔기 위한 투자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유·석유화학 통합시설’(COTC·Crude Oil To Chemical) 공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원유를 정제하면 에너지용 석유제품과 함께 약 10%가량 화학제품을 만드는 납사가 나온다. COTC는 말 그대로 원유에서 곧바로 화학제품을 뽑는 공정 방식이다. 기존 정제 공정에서 100의 원유를 투입했을 때 10의 화학제품이 나온다면, COTC 공정에서는 40 정도가 나온다. 3세대 COTC 공정이 도입되면 70이 나온다는 분석도 있다. 가격도 한국에서 만든 에틸렌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공정의 프로젝트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오만 등 중동 국가에서 8개가 진행되고 있다. 에틸렌 생산 기준 1123만t 규모다. 한국 전체 에틸렌 생산 규모는 1270만t이다. 세계 4위 석유화학 생산 국가가 하나 더 생긴다고 보면 된다.



아민 나세르 아람코 최고경영자(CEO)가 2023년 3월9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국가산업단지에서 열린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 기공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샤힌 프로젝트에 약 9조원을 투자했고 2026년 6월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멀리 중동, 중국에 갈 필요도 없다. 현재 울산 울주군에서는 에쓰오일 온산공장에 국내 석유화학 역사상 최대 규모인 ‘샤힌 프로젝트’ 공사가 한창이다. 샤힌은 아랍어로 사우디의 국조인 매를 뜻한다. 에쓰오일의 최대주주는 사우디의 국영석유회사 아람코다. 에쓰오일은 샤힌 프로젝트에 약 9조원을 투자했고 2026년 6월 준공이 목표다. 에틸렌 연간 생산량이 180만t으로 단일 설비 기준 세계 최대 설비다.
샤힌 프로젝트가 생산을 시작하는 2026년, 한국 화학산업에는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규모도 규모지만 산업 생태계 교란도 문제다. 통상 화학업체들은 수요가 늘면 공장 가동률을 높이고 수요가 줄면 가동률을 낮춰 시장가격을 조절한다. 경쟁업체들은 에쓰오일이 수요가 줄어도 공장 가동률을 높게 유지할 것을 우려한다.
아람코의 좀비 전략
아람코가 대규모 화학 설비를 만드는 것은 원유의 수요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화학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원유를 많이 소비하면 국제 유가를 유지할 수 있고, 그게 더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화학 업계 관계자는 “에쓰오일이 무조건 가동률을 높게 가져가는 것이 아람코에는 이익이기 때문에 가동률 유지가 목표가 될 것”이라며 “국내 화학 업계에서는 그런 상황을 ‘좀비’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월드컵 열기로 즐거웠고 풍요로웠던 200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만3천달러였다. 2023년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4천달러다. 한국은 우리가 체감하든 체감하지 않든 2000년대 초반보다 3배 가까이 잘살게 됐고, 가장 큰 동력은 중국의 경제성장이었다. 시간이 흘러 중국의 경제성장은 둔화했고 한국에서 수입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생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전기차 시대는 우리 예상보다 늦게 오고 있지만 산유국들이 전기차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첫 삽을 뜬 화학 공장들은 계속 지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감정적인 평가는 의미가 없다. 세상은 변했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화학산업은 더는 경기가 호전되면 좋아지는 경기 민감 업종이 아니라 구조조정이 필요한 사양산업이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