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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조수석에 앉은 아만다는 지도를 펼쳐들고 길라잡이하느라 클레이보다 더 신경이 곤두섰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 그런 번잡한 일은 내비게이션에 맡기고 느긋하게 창밖의 신록을 만끽할 수 있다. 인터넷 '초연결 세상'의 은총이다.
은행중고차대출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남매 16살 아치와 13살 로즈는 각자 무릎에 태블릿 PC를 올려놓고 집에서와 똑같이 인터넷 세상에 빠져든다. 아마 롱아일랜드까지 가는 1시간가량에 인터넷이 끊긴다면 아치와 로즈 모두 아만다의 여행계획에 난색을 표했을 듯하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시속 100㎞ 속도로 달리면서도 인터넷이 연결되는 놀라운 세상에 학자금대출기금 살고 있다. 로즈는 당시(1994~2004년) 미국의 전설적인 인기 드라마 '프렌즈(Friends)'에 몰입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치가 인상을 쓰고 창문을 내리면서 아만다에게 '로즈가 방귀 뀌었다'고 고발한다. 로즈는 방귀 뀌지 않았다고 혐의를 부인한다. 아치는 '엄마, 로즈가 이젠 거짓말까지 한다'고 혐의내용을 변경해서 다시 고발한다.
뱅크몰 미국 부모들은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을 경우엔 중죄로 다스린다. 그렇게 작은 소동이 지나간다. 아마 로즈가 방귀를 뀌기는 뀐 모양인데, 안 뀌었다고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프렌즈에 몰입하느라고 방귀를 뀐 줄도 인식 못하는 듯하다.
로즈는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빠 클레이에게 뉴욕에 돌아가면 프렌즈에 나오는 카페에 꼭 한번 debt 데려가 달라고 한다. 클레이가 그 카페는 드라마 세팅이라고 일러줘도 13살 소녀는 수긍하지 않는다.
차츰 인터넷은 물론 TV, 전화까지 먹통으로 바뀌고 초연결 세상이 완전 붕괴하는 재난사태 속에서도 로즈의 관심은 오직 프렌즈 최종회밖에 없다. 미국이 멸망하고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남의 일이다. 오직 프렌즈 최종회를 못 본다는 것만이 견딜 우울증 무료상담 수 없는 일이다. 로즈에겐 드라마 프렌즈가 현실세계이고 지금의 재난이 가상현실(VR)처럼 느껴진다. '몰입'을 지나 '과몰입' 상태에 빠져있다.
조선시대 「중종실록」에 기록된 가상현실 과몰입이 불러온 어처구니없는 실화實話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요즘의 성우나 배우에 해당하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신기한 이야기 전해주는 늙은이'이란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전기수는 문맹이 많았던 당시 청중들에게 실감나게 소설을 낭독해주는 직업이었다. 중종 시대 어느날 당시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던 한 전기수가 종로에 멍석 깔고 청중들에게 '임경업전'을 온갖 인물들의 대사를 손짓, 발짓, 표정, 감정을 살리며 실감나게 읊어주고 있었다.
인조仁祖 시대 권력욕과 간신, 정치모리배의 아이콘 김자점金自點이 영웅 임경업 장군을 모함하는 장면에 이르러, 이야기에 과몰입한 한 청중이 "김자점, 네 이놈!"하고 전기수를 칼로 찔러 죽였다. 혹시 이분도 어느 주막에서 과한 음주를 하고 나와 심신미약 상태였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까지는 실록에 전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품이든 미디어 콘텐츠든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소비자들이 로즈처럼 과몰입까지 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대박 보장이다. 프렌즈는 드라마의 몰입도에 있어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흉내 내기 쉽지 않다.
드라마 본연의 힘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면 음식에 미각적 몰입감을 위해 먹고 죽지 않을만큼 MSG를 퍼붓기도 하는 것처럼, 시각적 몰입감을 주기 위해서 맥락도 없이 남녀가 벌거벗고 뒹굴거나, 난데없이 총칼을 들고, 청각적 몰입을 위해 온갖 쌍욕들을 MSG처럼 퍼부어 버무린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결코 자극적이지 않고 무해한 흰쌀밥과 맹물에 과몰입하거나 중독되지는 않는다. '몰입沒入'이라는 우리말은 말 그대로 '깊이 빠져들어 간다'는 뜻이지만, 몰입으로 번역되는 영어 'mesmerize'의 의미는 조금은 달라서 '사기꾼이 최면을 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700년대 독일의 프란츠 메스머(Franz Mesmer)라는 의사는 자신이 우주에 충만한 모종의 기운을 끌어들여, 특히 모든 신경계 환자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당대 꽤나 명성을 떨쳤던 '요의妖醫'다.
IQ는 430이고 취미가 공중부양과 축지법이며 '내 눈만 바라봐도 우주의 기운을 받아 넌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고 설파했던 18세기 '독일판 허경영' 같은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메스머는 의학계로부터 사기꾼으로 선고받고 퇴출됐지만 변치 않는 추종자들 덕분에 평생 잘 먹고 잘 살았고, 그의 이름 'Mesmer'는 '사기나 최면을 통한 현혹, 매료, 몰입'이라는 영어 단어로 영원히 남았다. mesmerize인데, 의역하면 '메스머하다'쯤 된다.
12‧3 비상계엄에 보수 유튜브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사진|뉴시스]
메스머 같은 유튜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며칠 전부터 미국의 언론사, 사전 출판사마다 2024년도 '올해의 단어(The Word of the Year)'를 발표하고 있다. 그중에서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브레인 롯(Brain rot)'이다.
말 그대로 '뇌 상함‧썩음'이다. 무의미하거나 저질스러운 온갖 온라인 콘텐츠와 가짜뉴스에 과몰입해서 뇌가 썩어가는 현상의 심각성을 지목한다. 우리나라 올해의 단어로도 적절할 듯하다.
'12·3 비상계엄'은 혹시 메스머 같은 생계형 극우 유튜버들이 MSG 퍼부어대고 버무려서 조선시대 전기수처럼 실감나게 읊어대는 '종북세력'이나 '선거조작설'에 대통령이 매일 밤 과몰입한 끝에 칼을 휘두른 황당한 사건인지도 모르겠다.
망상은 자유'이니 논외로 하고 그 충정만은 알아달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인 것도 아닌 듯하다. 혹시라도 '종북세력‧선거조작설'도 모두 핑곗거리일 뿐, 대통령이 오직 '권력과 아내 지키기'에 과몰입해 벌어진 사건이라면 더더욱 고약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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