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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피스코 송가'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블로 네루다는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그는 생전 무수히 많은 작품에서 조국 칠레를 한 술에 빗댔다. 피스코(pisco)라는 술이다. 그가 창조한 시상(詩想)에서 피스코는 그저 술이 아니다. 칠레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우리나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주 입지에 가깝다.
그는 이 술을 묘사할 때 주로 세 가지 상징을 사용했다. 달빛과 별 같은 천체, 안데스산맥과 대지, 수정이나 물방울 같은 투명함. 모두 칠레 자연과 문화, 민족정신을 응축한 은유적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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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키 계곡 포도밭에서태양이 숙성시킨 과실이피스코가 되어 흐르네.그 맑은 물결 속에안데스 영혼이 깃들었네.
파블로 네루다 '대지의 노래'

지난달 21일 네루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엘키 계곡 포도밭을 찾았다. 해발고도 1200미터, 쨍한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포도 폐업 밭은 골짜기 사이사이 구름이 낀 안데스산맥을 배경으로 장관을 이뤘다. 맑은 하늘 아래 가지런히 뻗은 포도나무들이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졌다. 오래된 포도밭 한켠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 고목들은 잔뜩 뒤틀어진 모습으로 간신히 서 있었다. 그 사이로 현지 농부들은 포도송이를 다듬고 가지를 쳤다. 멀리서는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모습을 지 스마트폰개통현금지급 켜봤다.
“여러분 옆으로 흐르는 저 물은 안데스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빙하수입니다.”
칠레 북중부 엘키 밸리 한 포도밭에서 만난 호세 미겔 비아 수석 양조가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칠레 라 세레나 지역 한 바에서 바텐더가 피스코로 칵테일을 목동 푸르지오 만들고 있다. /유진우 기자


피스코는 명실상부한 칠레 국민 술이다. 한국인이 소주를 모를 수 없듯, 칠레에서 태어났다면 피스코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기원 역시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미에 포도나무를 들여온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칠레 문화유산위원회 역사학자 후안 카 하나은행 새희망홀씨 를로스 마르티네즈에 따르면 엘키 밸리와 리마리 밸리 일대에서는 잉카 제국 시대부터 포도로 발효주를 만들었다. 여기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져온 증류 기술을 더해 오늘날 피스코가 탄생했다. 피스코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서식하던 새를 케추어어(語)로 부르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칠레에서 피스코는 엄격한 규정에 따라 제조된다. 칠레는 피스코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원산지 보호 명칭 제도를 100여 년 전인 1931년부터 시작했다.
1940년부터 피스코를 만든 도냐 호세파의 올란도 첼메 대표는 “안데스 산맥의 높은 고도, 아침 저녁으로 습하고 낮에는 건조한 기후, 빙하수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진 곳에서만 제대로 된 피스코를 만들 수 있다”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통성을 가진 지역에서 만드는 술”이라고 말했다.
칠레 법률은 피스코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포도 품종을 13가지로 제한한다. 가장 중요한 품종은 무스카(Muscat)다. 우리나라에서 머스캣이라 불리는 이 포도는 향이 강렬하고 당도가 높다. 역사가 유구한 피스코 증류소에서는 오래된 참나무통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잘 익은 무스카 원액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그래픽=손민균


피스코 제조 과정은 여느 증류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포도를 수확해서 압착한 다음 발효와 증류, 숙성을 거쳐 마지막으로 병에 넣는다. 남다른 것 없는 과정에서 원재료와 증류 기술은 미묘한 차이를 만든다.
칠레 해안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훔볼트 해류는 매일 아침, 이 지역에 차갑고 습기가 많은 안개를 발생시킨다. 이 안개는 이내 한낮에 강렬한 태양에 내리쬐기 시작하면 사라진다. 습하고 서늘한 아침에 포도 열매는 산도를 축적한다. 반대로 건조하고 뜨거운 점심에는 당분을 쌓는다. 두 과정을 반복하면 포도 열매가 과하게 크지 않아도 강렬한 풍미를 제공한다.
자연이 모두에게 좋은 포도를 줬다면, 이를 자신만의 술로 바꾸는 건 양조가 몫이다. 이 지역 증류소는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증류한다. 스코틀랜드 특정 증류소들이 토탄을 태운 연기로 맥아를 건조하는 것처럼, 일부 증류소는 나무를 태워 증류기를 돌린다. 200년 넘은 오래된 증류기를 예전 방식 그대로 여태 사용하는 곳도 있다.
자욱한 연기 향은 엘키 지역 피스코를 칠레 다른 지역 피스코와 차별화하는 가장 큰 요소다. 가령 로스 니초스는 저마다 개성이 또렷한 엘키 밸리 피스코 중에서도 자기주장이 강한 생산자로 손꼽힌다. 매캐한 연기 향이 유난히 강하고 그 복잡성 또한 두드러진다. 이 브랜드는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강렬한 연기 향을 섬세하게 조율해 포도로 만든 증류주에 입혔다. 처음 코에 갖다 대면 확연한 연기 향이 퍼졌다가, 입에서는 달콤한 포도 풍미가 돋보인다. 이 같은 현상에 전문가들은 연기의 역설(The Smoky Paradox)이라는 근사한 애칭을 붙였다.
루이스 데 라 하라 메리노 푼도 로스 니초스 대표는 “오래된 구리 증류기를 사용해 첫 번째 증류에서 알코올을 추출하고, 두 번째에서는 향미 성분을 정제한다. 이 과정에서 좋은 향을 해치는 요소가 많은 초류(head)와 후류(tail)를 제거하고, 중간 부분 중류(heart)만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수확부터 증류를 마치기 위해선 9개월이 걸린다. 그는 증조부 대부터 시작한 피스코 증류소 일을 아버지에 이 158년째 하고 있다. 그의 아들도 뒤를 이을 예정이다.
메리노 대표는 “피스코 산업은 칠레 문화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품이기도 하지만, 이 지역 1만5000가구 생계가 달린 산업”이라며 “전통을 지키면서 현대 소비자 취향에 맞는 시도를 계속하기 위해 전통 브랜드와 프리미엄 브랜드를 나눠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프란시스코 무니사가 푼도 로스 리초스 대표가 피스코 증류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2024년 기준 칠레 정부는 피스코 산업 발전을 위해 연간 5000만달러(약 730억원)가 넘는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칠레 경제진흥청에 따르면 이 자금은 주로 피스코 품질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R&D), 소규모 생산자 보호를 위한 보조금,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마케팅에 쓰인다.
그러나 아직 아시아 시장에서 피스코 인지도는 낮은 수준이다.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주류시장에서는 전통적으로 위스키나 코냑 같은 유럽 증류주가 프리미엄 시장을 장악했다. 피스코에 앞서 데킬라가 증류주 시장을 오래도록 두드렸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칠레 정부와 주류업계는 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차별화 전략을 찾고 있다. 피스코를 어느 것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상태(NEAT·니트)로 마시는 대신, 피스코 사워 같은 칵테일로 즐기는 수요를 공략 중이다.
피스코 사워는 피스코에 레몬이나 라임즙, 설탕 등을 넣어 만든 칵테일이다. 상대적으로 도수가 낮고, 달콤해 칠레에서는 주로 식전주나 식후 입가심으로 마신다. 주류 메뉴가 있는 식당이라면 거의 모든 식사에 피스코 사워가 등장한다. 칠레 사람들은 주로 이 피스코 사워를 소파이피야 같은 식전 빵, 망하르라는 우유를 넣은 캐러멜 잼과 즐겼다.
파올라 바스케스 칠레 경제진흥청 이사는 “팬데믹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피스코 수요가 늘면서 올해 9월 이미 작년 전체 수출량을 넘어섰다”며 “피스코는 여러 칵테일에 사용해도 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도수가 높은 술을 소다나 다른 음료에 섞어 마시는 최근 믹솔로지(mixology) 추세에 잘 맞는 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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